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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조선시대 역사

[조선왕조 1편] 태조이성계 정종이방과 태종이방원 업적 총정리

by misohistory 2025. 5. 14.

조선왕조 500년, 그 장대한 역사의 첫 장이 시작됩니다. 이번 조선왕조 1편에서는 고려의 무장이었던 태조 이성계가 어떻게 새로운 왕조 '조선'을 세운 건국의 영웅이 되었는지, 그러나 그 기쁨도 잠시, 왕좌를 둘러싼 아들들의 피바람, '왕자의 난'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따라갑니다.

 

폭풍의 한가운데서 잠시 왕위를 지켰던 비운의 왕 정종 이방과, 그리고 마침내 형제들을 꺾고 권력을 쟁취한 '철혈 군주' 태종 이방원. 그가 어떻게 강력한 왕권을 확립하고 오늘날 우리가 아는 조선의 기틀을 단단히 다졌는지, 건국의 혼란과 격동 속에서 조선의 첫 역사를 써 내려간 세 왕의 이야기를 지금부터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프롤로그: 왕좌의 무게, 피로 쓴 조선의 시작

무너져가는 천년 왕국, 그 폐허 위에서 새로운 시대의 깃발이 올랐습니다. 그러나 찬란한 새 왕조의 서막 뒤편에는, 왕좌를 향한 피의 욕망과 엇갈린 운명이 소용돌이치고 있었습니다. 한 지붕 아래 같은 피를 나눈 형제들이 서로에게 칼을 겨눠야 했던 시대. 조선의 역사는 그렇게, 이상과 배신, 눈물과 야망이 뒤엉킨 채 첫 페이지를 열었습니다.

 

고려 말, 혼돈의 격랑 속에서 한 명의 영웅, 태조 이성계가 등장했습니다. 새로운 세상을 꿈꾸며 역성혁명의 칼을 뽑아 든 그가 세운 조선의 새벽은 결코 평화롭지 않았습니다.

왕좌를 둘러싼 형제들의 칼부림, '왕자의 난' 속에서 피어난 정종 이방과 와 태종 이방원의 시대. 그들의 숨겨진 고뇌와 선택, 그리고 ‘왕’이라는 이름의 무게를 따라가 봅니다.

 


1. 태조 이성계 (재위 1392~1398): 새 나라 조선을 세운 건국의 영웅

한 줄 평:
고려의 검으로 시작한 조선 건국의 아버지.

1-1. 왕이 되기까지: 혼돈의 시대, 새 영웅의 등장

고려 말, 백성의 희망으로 떠오르다

고려 말, 나라는 안팎으로 무너져 내리고 있었습니다. 조정은 권문세족의 부패로 썩어갔고, 밖으로는 왜구의 침략이 끊이지 않아 백성의 고통은 극에 달했습니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한 인물이 백성들의 희망으로 떠올랐으니, 바로 무장 태조 이성계였습니다. 그는 탁월한 무용으로 왜구를 토벌하며 민심과 군권을 동시에 장악해 나갔습니다.

 

위화도 회군: 역사의 물줄기를 돌리다

1388년, 고려 조정은 요동 정벌이라는 무리한 명령을 내립니다. 군사를 이끌고 압록강 위화도까지 북상한 이성계는 중대한 결단을 내립니다.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치는 것은 옳지 않으며, 여름철 농번기에 군사를 동원하는 것은 불가하다"는'4 불가론'을 내세우며 군대의 말머리를 돌렸습니다.

위화도 회군은 단순한 철군이 아닌, 부패한 고려 왕조에 등을 돌리고 역사의 방향을 새로 쓰겠다는 선전포고이자, 사실상의 쿠데타였습니다.

 

조선 건국: 새 시대의 문을 열다

개경으로 돌아와 정권을 장악한 이성계는 정도전, 조준 등 급진개혁파 신진사대부와 손을 잡았습니다. 그들은 고려의 낡은 체제를 무너뜨리고 성리학적 이상 국가를 설계하기 시작했습니다.

 

마침내 1392년, 공양왕으로부터 왕위를 물려받는 '선위'의 형식으로 피를 흘리지 않고 새 왕조, 조선의 문을 열었습니다. 그러나 건국의 기쁨도 잠시, 왕좌는 그에게 축복만큼이나 무거운 짐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 더 깊이 알아보기: 고려 위화도 회군에서 조선 건국까지, 태조 이성계의 전체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1-2. 주요 업적: 조선의 밑그림을 그리다

태조 이성계는 단순한 무장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건국의 파트너이자 설계자였던 정도전과 함께 조선이라는 새 나라의 기틀을 다진 개혁 군주였습니다. 그의 재위 기간 동안 조선의 정치, 경제, 사회의 근본적인 설계가 이루어졌습니다.

 

정치: 재상 중심의 유교 국가를 설계하다

  • 숭유억불 정책: 고려 말, 막대한 토지를 소유하며 정치·경제적 폐단을 낳았던 불교를 개혁하고자 했습니다.
    사찰의 토지와 노비를 일부 몰수하고 종파를 통폐합하는 숭유억불 정책을 통해 구 세력의 경제적 기반을 약화시키고, 신진사대부의 이념인 성리학을 국가 통치의 근본으로 삼았습니다.

  • 《조선경국전》과 재상 중심 정치: 건국의 설계자 정도전은, 새로운 나라 조선을 경영할 기본적인 통치 규범을 마련하기 위해 《조선경국전》을 편찬했습니다.
    비록 정도전 개인이 편찬한 사찬 법전이지만, 조선 건국의 이념을 설계한 그의 저작이라는 점에서 단순한 책 이상의 의미를 가집니다.
    또한, 《조선경국전》은 주례(周禮)의 6전 체제를 바탕으로 조선의 실정에 맞게 구성되어, 훗날 조선의 공식 법전인 《경제육전》을 거쳐 최종적으로 《경국대전》을 편찬하는 데 모체(母體)가 되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법제사적 가치를 지닙니다.

    이 책의 전체적인 구조는, 왕은 도덕적 상징으로서 군림하고 유능한 재상이 실질적인 국정을 이끌어야 한다는 재상 중심의 정치 철학을 강력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 중앙 관제 확립: 국정 최고 기관인 의정부와 그 아래에 실무를 담당하는 6조(이·호·예·병·형·공)를 두는 중앙 관료 체제를 정비하고, 사헌부·사간원 같은 언론 기관을 두어 권력의 균형을 꾀했습니다.

 

수도와 외교: 나라의 위상과 체계를 세우다

  • 한양 천도와 도시 계획: 1394년, 새 왕조의 중심지로 한양으로 천도하고 한성부로 명명했습니다.

    특히 정도전은 유교 경전의 원리에 따라 궁궐의 왼쪽에는 역대 왕들의 위패를 모시는 종묘를, 오른쪽에는 토지와 곡식의 신에게 제사 지내는 사직단을 배치하는 '좌묘우사(左廟右社)'의 원칙에 따라 수도를 설계했습니다.
    경복궁과 그 전각들의 이름(근정전, 사정전 등)을 직접 지으며 조선의 상징적 공간을 완성했습니다.

  • 명과의 긴장 관계와 실리 외교 (친명정책): 건국 초기 명나라와의 관계는 순탄치 않았습니다. 명 태조 홍무제는 조선이 보낸 외교 문서의 글자 하나하나를 트집 잡아 사신을 억류하는 '표문 문제'를 일으키며 조선을 압박했습니다.
    이런 긴장 관계 속에서도 태조는 조공-책봉이라는 큰 틀 안에서 '조선'이라는 국호를 인정받는 등 왕조의 정통성을 확보하고 실리를 챙기는 줄타기 외교를 펼쳤습니다.

 

경제와 사회: 국가의 재정과 국방을 다지다

  • 과전법 실시: 조선 건국 직전인 1391년, 권문세족의 대토지를 몰수하여 신진관료에게 재분배하는 과전법을 실시했습니다. 이는 신진사대부의 경제적 기반을 마련하고 국가 재정을 확보하여 민생 안정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 사병 혁파 시도와 갈등의 서막: 고려 말부터 이어진 사병은 왕권을 위협하는 요소였습니다. 정도전은 모든 사병을 국가의 군대인 의흥삼군부로 편입시키려 했습니다.
    '사병 혁파'는 왕자들의 군사력을 제거하려는 시도였기에, 가장 강력한 사병을 거느렸던 이방원의 극심한 반발을 샀고, 이는 결국 왕자의 난을 촉발하는 결정적인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 《고려국사》 편찬 시작: 전란으로 유실되고 잘못 기록된 이전 왕조의 역사를 바로잡는다는 명분 아래, 고려의 역사를 정리하는 《고려국사》 편찬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이 과정에는 조선 건국의 주체 세력이었던 신진사대부의 성리학적 역사관이 자연스럽게 반영되었습니다.

 

1-3. 갈등과 퇴위: 아들의 칼에 상처 입은 아버지

갈등의 씨앗, 세자 책봉

조선을 세운 태조와 설계자 정도전은 재상이 중심이 되는 이상적인 나라를 꿈꿨습니다. 그러나 이 꿈은 태조의 결정 하나로 치명적인 균열을 맞이합니다. 바로 후계자 문제였습니다.

태조는 첫째 부인 한 씨 소생(신의왕후)의 아들들이 아닌, 둘째 부인 강 씨 소생(신덕왕후)의 어린 막내아들 의안대군 이방석을 세자로 책봉했습니다.

 

피로 물든 왕좌, 제1차 왕자의 난

조선 건국 과정에서 가장 큰 공을 세웠던 다섯째 아들 정안군 이방원에게 이 결정은 사형 선고나 다름없었습니다. 자신을 따르던 공신 세력과 함께 정권에서 완전히 배제될 위기감을 느낀 것입니다. 더구나 정도전은 왕자들의 사병을 혁파하며 이방원을 끊임없이 견제했습니다.

 

마침내 1398년, 이방원은 칼을 뽑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제1차 왕자의 난(무인정사)입니다. 그는 자신을 위협하던 정도전과 남은 등을 무자비하게 제거하고, 이복동생인 세자 의안대군 이방석과 그의 형 무안대군 이방번마저 살해했습니다.

 

이는 단순히 권력을 차지하기 위한 싸움이 아니라, 아버지의 선택에 대한 아들의 반역이자, 신권(臣權) 중심의 나라를 꿈꾸던 개혁파에 대한 종언이었습니다.

 

힘없이 물러난 건국의 영웅

가장 믿었던 아들이 가장 사랑했던 아들과 벗을 죽이는 참혹한 현실 앞에, 태조는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그는 충격과 슬픔 속에서 더 이상 왕의 자리를 지킬 수 없었습니다.

 

스스로 왕위에서 물러났지만, 이는 사실상 아들 이방원에 의한 조용한 축출이었습니다. 왕위는 둘째 아들 영안군 이방과(정종)에게 넘어갔지만, 모두가 알고 있었습니다. 조선의 진짜 실권자는 이제 이방원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경복궁 근정전의 전체 전경으로 2단의 월대 위에 기단을 두고 그 위로 중층으로 올린 기와 건물로 왕의 위엄이 느껴지듯 웅장한 모습을 하고 있다.
📸 사진 설명: 경복궁 근정전 전체 전경으로 정도전은 유교적 이념에 따라 도성을 설계 했으며, 중심에 경복궁을 두고 좌묘우사(左廟右社)의 원칙에 따라 동쪽에 종묘(왕실 제사), 서쪽에 사직단(국가 제사)을 배치해 유교적 정치 체계를 시각적으로 구현했습니다. 경복궁은 왕실의 상징이자 국가 통치의 중심지로 기능하게 됩니다.

 

📎 이미지 출처 및 더 보기: 국가유산청 궁능유적본부 궁능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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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정종 이방과 (재위 1398~1400): 폭풍 속 비운의 관리자

한 줄 평:
동생의 칼날 위에서 잠시 왕좌를 지켰던, 혼란기의 관리자.

2-1. 왕위 계승 배경: 칼끝 위에서 만들어진 왕좌

1398년, 제1차 왕자의 난으로 정도전과 세자 이방석이 제거되자 조선의 권력은 진공 상태에 빠졌습니다. 피의 숙청을 주도한 정안군 이방원(태종)이 실질적인 일인자로 떠올랐지만, 그는 곧바로 왕위에 오르지 않았습니다.

 

건국 공신들과 이복동생을 죽인 직후 왕이 되는 것은 엄청난 정치적 부담을 안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때 이방원은 영리한 선택을 합니다. 바로 자신의 친형이자 태조의 둘째 아들인 영안군 이방과(정종)를 왕으로 내세운 것입니다.

 

성품이 온화하고 권력욕이 없었던 정종을 왕위에 앉힘으로써, 자신의 정변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반발을 최소화하려는 정치적 계산이었습니다. 살아있는 아버지 태조 이성계의 시선 또한 무시할 수 없었을 겁니다.

 

그렇게 정종은 왕위에 올랐지만, 이는 스스로 쟁취한 권력이 아니었습니다. 모든 실권은 동생 이방원이 쥔 채, 정종은 이름뿐인 '왕 아닌 왕'의 시대를 열게 됩니다.

 

2-2. 주요 정치 흐름: 동생의 나라를 위한 기반 다지기

정종의 재위 2년은 새로운 개혁보다는 혼란을 수습하고, 실권자인 이방원에게 권력을 안전하게 이양하기 위한 준비 기간의 성격이 강했습니다. 모든 정책은 정종의 이름으로 시행되었지만, 그 설계와 실행은 이방원의 손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수도를 옮기다: 피의 도시 한양을 떠나다

정종은 즉위 이듬해인 1399년, 수도를 한양에서 고려의 옛 수도였던 개경으로 다시 옮깁니다.개경 천도의 배경은 복합적이었습니다.

  • 표면적 명분: 제1차 왕자의 난으로 흉흉해진 한양의 민심을 수습하고 조정을 안정시킨다는 것이었습니다.
  • 실제 배경
  • 아버지 태조의 상황: 아들들의 피를 본 한양에 더는 머물고 싶지 않았던 태조 이성계의 마음을 달래기 위한 목적이 컸습니다.
  • 이방원의 정치적 계산: 자신에게 적대적인 구세력의 근거지였던 한양을 떠나, 새로운 정치 판을 짜려는 이방원을 비롯한 실권 세력의 건의가 결정적이었습니다.

 

권력 구조를 재편하다: 모든 길은 이방원으로

  • 관제 개혁: 국정 최고 의결기구였던 도평의사사를 의정부로 개편하고, 중추원이 가진 군사 기능을 분리하여 삼군부 설치를 추진했습니다. 이는 의정부를 통해 행정권을, 삼군부를 통해 군사권을 장악하려는 이방원의 핵심적인 권력 재편 작업이었습니다. (삼군부 설치는 태종 때 완성됩니다.)

  • 법전 정비: 법령 정비를 위한 기구로 조례상정도감을 설치했습니다. 이는 훗날 조선의 기본 법전인 《경제육전》이 편찬되는 중요한 기초가 되었습니다.

  • 이방원 세력 강화: 제1차 왕자의 난 공신들을 책봉하고, 이방원의 처가인 여흥 민 씨 세력을 중용하는 등 조정 내 이방원 중심의 권력 기반을 공식적으로 단단히 다졌습니다.

 

가장 위험한 개혁: 사병 혁파

이 시기 가장 중요하고 위험했던 개혁은 바로 사병 혁파였습니다. 왕자와 공신들이 개인적으로 거느린 사병은 왕권을 위협하는 가장 큰 요소였습니다. 이방원은 정종의 이름으로 이 모든 사병을 국가의 정식 군대로 편입시켰습니다.

이는 다른 왕자들의 군사적 기반을 완전히 제거하여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려는 목적이었으나, 이는 또 다른 피바람, 즉 제2차 왕자의 난을 예고하는 일이었습니다.

 

2-3. 갈등과 퇴위: 역할을 마치고 물러나다

정종이 왕위에 있는 동안에도 권력을 향한 야망은 꺼지지 않았습니다. 1400년, 태조의 넷째 아들이자 정종의 친동생인 회안대군 이방간이 박포 등과 손잡고 이방원을 제거하기 위해 군사를 일으켰습니다. 이것이 바로 제2차 왕자의 난(박포의 난)입니다.

 

이방원은 이 반란을 손쉽게 진압했지만, 또다시 형제끼리 칼을 겨눈 이 사건은 정종의 정치적 입지를 완전히 무너뜨리는 결정타가 되었습니다. 더 이상 허수아비 왕으로 머물 명분조차 사라진 것입니다.

 

결국 같은 해, 정종은 이 모든 혼란의 책임을 지고 스스로 왕위를 동생 정안군 이방원에게 물려줍니다. 자신의 재위가 '권력 이양을 위한 과도기'였음을 인정하고, 역사의 주연 자리에서 조용히 퇴장한 것입니다. 이후 그는 상왕으로 물러나 정치에 일절 관여하지 않고 천수를 누리며 평화로운 말년을 보냈습니다.


3. 태종 이방원 (재위 1400~1418): 철권으로 나라의 기틀을 다진 군주

한 줄 평:
냉혹한 권력가이자 가장 효율적인 시스템 설계자.

3-1. 왕위 계승 배경: 두 번의 피바람 끝에 얻은 왕위

태종 이방원은 조선 건국 과정에서 누구보다 혁혁한 공을 세웠지만, 정도전과의 갈등과 세자 책봉 문제로 권력 중심에서 밀려나자 스스로 칼을 들었습니다.

 

제1차 왕자의 난(1398)으로 정도전과 이복형제들을 제거한 후, 이방원은 바로 왕위에 오르지 않고 둘째 형 정종 이방과를 왕으로 옹립하며 정치적 명분을 챙겼습니다. 그러나 실권은 이미 그의 것이었습니다.

 

1400년, 그의 형인 회안대군 이방간이 박포 등과 결탁하여 이방원을 제거하려 한 제2차 왕자의 난이 일어났습니다. 이방원은 이를 신속히 진압하며 자신에게 대항하는 마지막 형제 세력마저 정리하고 조선의 권력을 완전히 장악했습니다.

 

마침내 같은 해, 형인 정종 이방과에게 왕위를 물려받아 조선의 제3대 왕, 태종으로 즉위합니다. 그의 왕좌는 두 번의 피바람 위에 세워졌지만, 이는 동시에 강력한 왕권 국가를 향한 서막이기도 했습니다.

 

더 깊이 알아보기: 피로 물든 왕자의 난, 그 모든 과정이 궁금하다면?

 

3-2. 주요 업적: 강력한 왕권 국가를 설계하다

태종의 통치 철학은 명확했습니다. "모든 권력은 왕에게로 집중되어야 한다." 그는 신하들이 국정을 흔들었던 혼란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단호하고 때로는 무자비한 정책들로 조선의 시스템을 근본부터 뜯어고쳤습니다.

 

행정: 왕이 모든 것을 직접 다스리다

  • 6조 직계제 실시: 태종의 왕권 강화 정책 중 가장 핵심적인 제도입니다. 6조의 판서들이 의정부를 거치지 않고 오직 왕에게만 직접 보고하고, 왕의 명령을 받아 정사를 처리하게 했습니다.

  • 의정부 기능 축소: 6조 직계제로 인해, 국가의 모든 중요 정책을 합의하던 의정부는 사실상 국왕의 자문기구로 역할이 축소되었습니다. 이는 정승 중심의 합의 정치를 끝내고, 국왕 중심의 강력한 행정 체계를 확립했음을 의미합니다.

  • 신문고 설치(1401년): 억울한 일을 당한 백성이 직접 왕에게 호소할 수 있는 신문고를 설치하여 민심을 직접 파악하고 관리들의 비리를 감찰했습니다.

 

군사: 왕만이 유일한 군 통수권자가 되다

  • 사병 혁파 완성: 왕자나 공신이 사적으로 보유했던 모든 군대를 국가의 정식 군대로 귀속시켜, 왕 이외에는 누구도 군사력을 가질 수 없도록 만들었습니다.

  • 군사 제도 정비: 기존의 의흥삼군부를 폐지하고 병조의 군정 기능을 강화했습니다. 이를 통해 군사 지휘권을 국왕에게 완벽하게 집중시켜, 무력을 통한 통치 기반을 국왕이 독점하고 왕권 안정을 꾀했습니다.

 

인사와 언론: 왕의 사람을 뽑고 신하를 감시하다

  • 과거제 운영 강화: 문·무과 시험을 통해 능력 중심의 인재를 선발하여, 자신에게 충성하는 새로운 관료층으로 조정의 물갈이를 꾀했습니다.

  • 언론기관 활용 및 통제: 사헌부·사간원 같은 언론기관을 정비하여 관료에 대한 감찰 기능을 강화했지만, 동시에 왕권에 도전하는 비판은 억압하며 언론을 왕권 강화의 수단으로 활용했습니다.

 

경제와 사회: 국가의 재정을 채우고 백성을 파악하다

  • 호패법 시행(1413년): 16세 이상 모든 남성에게 신분증인 호패를 발급하여, 전국의 인구를 정확히 파악하고 조세 징수와 군역 동원의 효율성을 극대화했습니다.

  • 토지 및 호적 재정비: 숨겨진 토지(은결)를 찾아내는 양전 사업과 호적 재정비를 통해 국가 재정 기반을 튼튼히 했습니다.

  • 과전법 재정비: 과전의 불법적인 점유와 세습을 막고 지급 기준을 엄격히 하여 국가의 토지 지배력을 강화하고 재정 기반을 안정시켰습니다.

 

정치: 왕권의 걸림돌을 제거하다

  • 외척과 공신 숙청: 태종은 왕권에 위협이 될 만한 세력은 가차 없이 제거했습니다.
    그 칼날은 자신을 왕으로 만드는 데 가장 큰 공을 세운 처남들, 즉 원경왕후 민 씨의 남동생 (민무구, 민무질 등)에게까지 향했습니다. 막강한 권력을 갖게 된 외척 세력이 훗날 왕권을 위협할 것이라 판단하고 역모로 몰아 숙청했습니다.

 

외교: 주변 질서를 재정립하다

  • 명과의 관계 안정화: 명나라와의 사대 관계를 더욱 공고히 하여 왕위 계승의 정통성을 국제적으로 인정받고 안정적인 외교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 주변국과의 관계 정립: 북방의 여진에 대해서는 회유와 토벌을 병행하며 국경을 안정시키고, 일본에 대해서는 왜구의 노략질을 억제하고 제한적인 교역을 허용하는 등 실리적인 외교 정책을 펼쳤습니다.

 

3-3. 갈등과 퇴위: 완벽한 승계를 위한 마지막 통치

강력한 카리스마로 국가를 장악한 태종이었지만, 그는 권력에 집착하지 않고 권력을 다룰 줄 아는 군주였습니다. 그는 자유분방한 성격의 장남 양녕대군(이제)이 왕의 자질이 부족하다고 판단하자, 과감하게 세자 자리에서 폐위시켰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학문을 좋아하고 성품이 올곧은 셋째 아들 충녕대군(이도, 훗날 세종대왕)을 앉혔습니다. 1418년, 태종은 스스로 왕위를 세종에게 물려주고 상왕이 됩니다. 하지만 그는 즉시 모든 권력을 내려놓지 않았습니다.

 

병권(군사권)만큼은 자신이 계속 쥐고, 세종의 장인이자 외척이 될 심온(소헌왕후 아버지)과 그 가문을 숙청하는 등, 어린 아들이 안정적으로 통치할 수 있도록 마지막까지 '궂은일'을 도맡아 처리했습니다.

 

태종의 퇴위는 단순한 물러남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이 피로 만든 강력한 왕조의 기틀 위에서, 가장 위대한 성군이 마음껏 능력을 펼칠 수 있도록 모든 걸림돌을 치워준, 가장 완벽한 권력 이양이었습니다.


에필로그: 반석을 다진 왕, 꽃을 피울 왕에게

혼돈의 고려 말을 끝내고 새 나라의 문을 연 건국의 아버지 태조 이성계, 피바람 속에서 잠시 숨을 고르며 다음 시대를 준비했던 과도기의 관리자 정종 이방과, 그리고 냉혹한 철권으로 마침내 조선이라는 국가의 시스템을 완성한 설계자 태종 이방원.

 

조선의 첫 50년은 그야말로 격동의 역사였습니다. 이상과 현실, 명분과 실리, 부자간의 애증과 형제간의 비극이 뒤엉킨 채 조선은 비로소 나라의 기틀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태조가 조선의 청사진을 그렸다면, 태종은 그 위에 누구도 넘볼 수 없는 단단한 반석을 올려놓았습니다.

 

이제, 모든 준비는 끝났습니다. 잘 닦인 무대 위로,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군주가 등장할 시간입니다. 다음 2편에서는 태종이 마련한 이 튼튼한 기반 위에서 찬란한 민족의 문화를 꽃피운 세종대왕의 이야기로 여러분을 찾아가겠습니다.


※ 안 내 

'조선왕조 업적 완전정복' 시리즈로 1편에서 9편으로 이어지는 조선왕조 27명 왕들의 업적을 총정리가 계속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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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 수 제 목 상 태
2편 [조선왕조 2편] 세종이도 문종이향 단종이홍위 업적 총정리  발행 완료
3편 [조선왕조 3편] 세조이유 예종이황 성종이혈 업적 총정리 발행 완료
4편 [조선왕조 4편] 연산군이융 중종이역 인종이호 업적 총정리 발행 완료
5편 [조선왕조 5편]–명종이환 선조이연 광해군이혼 업적 총정리 발행 완료
6편
[조선왕조 6편] 인조이종 효종이호 현종이연 업적 총정리
발행 예정
7편
[조선왕조 7편] 숙종이순 경종이윤 영조이금 업적 총정리
발행 예정
8편
[조선왕조 8편] 정조이산 순조이공 헌종이환 업적 총정리
발행 예정
9편 [조선왕조 9편] 철종이변 고종이희 순종이척 업적 총정리 발행 예정

 


📚 참고 자료 출처

※ 모든 자료는 위의 공식 기관에서 제공한 원문 또는 요약본을 기반으로 내용을 재구성 정리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