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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역사

고려 위화도 회군에서 조선 건국 태조 이성계로 거듭나다

by misohistory 2025. 5. 15.

고려의 영웅에서 조선의 개국 군주로.
역사의 무대에서 가장 극적인 순간을 만들어낸 이성계.
위화도 회군에서 조선 건국_

조선왕조 500년의 역사가 시작된다


프롤로그

고려의 마지막 장군이자 조선의 첫 번째 왕이 된 남자. 이성계라는 이름은 고려의 끝과 조선의 시작을 잇는 강렬한 역사의 한 획이었다. 불안정한 고려 말, 나라를 구한 영웅이었던 그는 왜구를 물리치고 나라를 지켰지만, 이내 왕의 칼이 되어 위화도에서 역사를 뒤집었다.

조선을 세운다는 건 단순히 왕조를 바꾸는 일이 아니었다. 그는 고려의 유산을 등에 업고 새로운 시대를 열어젖혔다. 하지만 한 나라의 건국자가 되기까지의 길은 결코 평탄하지 않았다. 이성계의 출생에서 성장, 군사적 활약과 위화도 회군의 진실. 그리고 조선 건국에 이르기까지. 그가 걸어온 길을 따라가 보자.

 

1. 출생과 성장 배경

고려 말기, 국운이 기울고 있던 1335년. 함경도의 서쪽 끝, 영흥에서 한 아기가 태어났다. 이름은 이성계. 그는 훗날 조선의 태조가 될 인물이었다. 이성계의 출생은 단순히 한 무장의 탄생이 아니었다. 그의 아버지 이자춘은 고려 말기의 혼란한 정세 속에서 원나라의 지배 하에 있던 동북면 지역에서 세력을 키운 유력자였다.


이자춘은 고려가 쌍성총관부를 수복할 때 내응하여 공을 세우고 고려의 관리가 되었으며, 함경도 일대에서 무력과 세력을 키워나갔다. 아버지의 강력한 힘을 바탕으로 어린 이성계는 자연스레 무장으로서의 자질을 키워나갔다.

이성계는 어린 시절부터 활쏘기와 말타기에 뛰어났고, 그의 전투 능력은 일찍이 전장에서도 빛을 발했다. 특히 홍건적과 왜구의 침입이 끊이지 않던 시절, 그는 용맹한 장수로서 이름을 떨치게 된다.

 

1360년대홍건적의 대대적인 침입 당시, 그리고 이후 끊임없는 왜구의 노략질 속에서 이성계는 함흥과 서북면, 남해안 일대에서 군대를 이끌고 적을 격퇴했다. 특히 1380년 황산대첩에서 왜구를 크게 물리친 전투는 그의 명성을 드높였다. 이러한 전투들에서 그는 절묘한 전략과 탁월한 전투 능력으로 고려 왕실의 신임을 얻게 되었고, 전쟁 영웅으로 떠오른다.

 

고려의 몰락을 목격하며 성장한 이성계는 무장으로서의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며 점차 왕조의 핵심 인물로 자리 잡아갔다.

그의 운명은 점점 고려의 영웅에서 조선의 건국자로 향하고 있었다.

 

2. 가족관계와 가문 배경

이성계는 첫 번째 부인 정비 신의왕후 한 씨, 두 번째 부인 계비 신덕왕후 강 씨 그리고 후궁을 여럿 두었다.

 

신의왕후의 한 씨 집안 내력과 혼인 배경

신의왕후 한 씨는 안변 한 씨로, 고려 개국공신 한란(韓蘭)의 후손이며, 함흥 지역의 유력한 향리 가문 출신이었다. 그녀의 집안은 지역 내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고, 이성계 가문과의 혼인은 동북면 지역 토착 세력 간의 결속을 다지는 의미가 있었다.

 

이성계와 한 씨의 혼인은 당시의 관례에 따라 가문 간의 연대를 강화하는 성격이 강했다. 이를 통해 이성계는 함흥 지역에서의 기반을 더욱 공고히 할 수 있었다. 신의왕후는 조선 건국 전에 사망했지만, 여섯 아들과 두 딸을 낳아 이성계의 든든한 가계의 기반이 되었다.

 

신의왕후 한 씨의 소생으로는 첫째 아들 이방우 조선 건국에 반대하며 고려에 대한 충절을 지키려다 일찍 사망했다. 둘째 아들 이방과 온화한 성품으로, 조선 건국 후 형제들 사이의 완충 역할을 하다 제2대 왕 정종으로 즉위했다. 셋째 아들 이방의는 정치적 활동이 두드러지지 않았으나, 왕자의 난 이후 이방원의 영향력 아래 있었다.

 

넷째 아들 이방원은 뛰어난 능력과 야심을 바탕으로 왕자의 난을 일으켜 형제들을 제압하고 조선의 제3대 왕 태종이 되었다. 다섯째 아들 이방간은 이방원과의 권력 다툼(제2차 왕자의 난)에서 패배하고 유배되었다. 여섯째 아들 이방연은 어려서 사망했다.

 

딸들 역시 혼인을 통해 다른 가문과의 연결고리가 되었다. 첫째 딸 경신공주와 둘째 딸 경선공주는 각각 유력 가문과 혼인하여 초기 왕실의 안정에 기여했다.

 

신덕왕후 강 씨의 집안 내력 혼인 배경

신덕왕후 강 씨는 곡산 강 씨로, 고려 말 중앙 정계에서도 영향력 있는 권문세족 출신이었다. 그녀의 아버지 강윤성은 고려 후기 주요 관직을 역임한 인물이었다.


이성계가 개경에서 중앙 정계의 주요 인물로 부상하던 시기에 이루어진 강 씨와의 혼인은 그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강 씨는 이성계의 두 번째 정실부인으로, 조선 건국 후 왕비가 되었다.

 

강 씨는 두 아들과 딸 하나를 낳았다. 첫째 아들 이방번과 둘째 아들 이방석은 조선 건국 후 태조의 총애를 받았다. 특히 이방석은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세자로 책봉되었는데, 이는 신의왕후 소생의 장성한 아들들, 특히 이방원의 격렬한 반발을 샀다.

 

결국 이방석의 세자 책봉은 제1차 왕자의 난(1398년)을 촉발하는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이 난으로 이방석과 이방번은 이방원에 의해 무참히 살해되었고, 신덕왕후는 이미 사망(1396년) 한 후였다. 이성계의 가족관계는 단순한 혈연을 넘어 치열한 정치적 갈등과 권력 다툼의 중심이 되었다.

 

그의 아들들 사이에서 벌어진 왕자의 난은 조선 왕조 초기에 큰 상처를 남겼고, 결국 이성계는 아버지이자 왕으로서 자신의 자식들이 피를 흘리는 비극을 목도하게 된다.


조선-태조-어진경복궁-흥례문-전체-전경종묘-정전

📸 사진 설명 : 조선 태조 어진(왼쪽), 경복궁 흥례문 전체전경(가운데), 종묘 정전(오른쪽)

 정도전은 유교적 이념에 따라 도성을 설계했다. 중심에 경복궁을 두고, 좌묘우사(左廟右社)의 원칙에 따라 동쪽에 종묘(왕실 제사), 서쪽에 사직단(국가 제사)을 배치해 유교적 정치 체계를 시각적으로 구현했다. 경복궁은 왕실의 상징이자 국가 통치의 중심지로 기능하게 된다.

 

조선 태조 어진  : 전라북도 전주 경기전 어진박물관 소장.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초상화로 가로 150㎝, 세로 218㎝이다. 태조의 초상화는 한 나라의 시조로서 국초부터 여러 곳에 특별하게 보관되어 총 26점이 있었으나 현재 전주 경기전에 있는 태조 초상화 1점만이 남아있다. 고종 9년(1872)에 낡은 원본을 그대로 새로 옮겨 그린 것인데, 전체적으로 원본에 충실하게 그려 초상화 중 가장 표현하기 어려운 정면상임에도 불구하고 훌륭하게 소화해 낸 작품으로 조선 전기 초상화 연구에 있어 귀중한 자료가 된다.

 경복궁 흥례문 :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 근정전의 정문인 근정문 사이에 있는 중문이다. 흥례문(興禮門)은 경복궁의 중문으로 ‘흥례’는 ‘예를 일으킨다’라는 뜻이다. 흥례문의 원래 이름은 ‘홍례문’이었으나 1867년(고종 4년) 경복궁을 다시 지을 때 지금의 이름으로 바꾸었다. 흥례문은 일제강점기 때 조선총독부 청사를 지으면서 철거되었다가, 1996년 조선총독부 청사를 철거한 후 2001년에 복원하였다.

종묘 정전  : 정전(正殿)은 왕과 왕비가 세상을 떠난 후 궁궐에서 삼년상(27개월)을 치른 다음에 그 신주를 옮겨와 모시는 건물로 종묘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곳이다.

 

📎 사진설명 출처  ※ 위의 설명은 모두 국가유산청 국가유산포털의 공식 설명을 인용한 내용입니다.

📎 이미지 출처 및 더 보기 : 국가유산포털 궁능유적본부 궁능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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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고려 말 권력 장악 과정

고려 말은 왕권이 쇠락하고 외세의 침입이 잦아들던 혼란기였다. 이성계는 이 시기에 군사적 능력을 발휘하며 두각을 나타냈다. 그의 권력 장악 과정은 크게 홍건적 격퇴, 주요 인물들과의 관계 등으로 살펴볼 수 있다.

 

1) 홍건적 격퇴 – 고려의 영웅이 되다

1361년, 중국 원나라 말기 농민 반란군인 홍건적이 대규모로 고려를 침략했다. 이들은 개경까지 함락시키고 왕실이 남쪽으로 피신하는 위급한 상황을 만들었다. 이때 이성계는 1362년 초, 함흥에서 사병 2천 명을 이끌고 내려와 수도 탈환 작전에 결정적인 공을 세웠다. 그는 탁월한 전략과 용병술로 홍건적을 격파했고, 이는 고려 왕실의 깊은 신임을 얻으며 그가 중앙 정계로 진출하는 발판이 되었다. 개경 수복 후 백성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이성계는 고려의 군사적 영웅으로 확실히 자리매김했다.

 

2) 최영과의 관계 – 협력과 갈등의 교차

이성계가 중앙 정계에서 주목받기 시작할 무렵, 고려 조정의 대표적인 무장은 최영이었다. 충절과 강직함으로 명망 높던 최영은 이성계의 군사적 능력을 인정하고 때로는 협력하며 왜구와 북방의 위협에 맞섰다. 이성계 역시 최영을 존경하며 따랐으나, 우왕 말기 명나라의 철령위 설치에 반발한 최영이 요동 정벌을 강력히 주장하면서 두 사람의 관계는 결정적인 갈등 국면으로 접어든다. 이성계는 현실적인 이유를 들어 요동 정벌을 반대했지만, 최영은 이를 강행했고, 이는 훗날 위화도 회군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3) 공민왕의 신임과 신진사대부와의 연대

이성계의 성장에 있어 공민왕의 역할도 빼놓을 수 없다. 공민왕은 반원자주 정책을 추진하며, 그의 아버지 이자춘이 쌍성총관부 수복에 공을 세운 이래 이성계 가문을 주목했다. 이후 이성계가 홍건적 격퇴 등에서 혁혁한 공을 세우자, 공민왕은 그를 적극 중용하며 군사적 요직에 임명했다.

공민왕 사후, 고려 조정은 권문세족(이인임 등)과 신진사대부 세력 간의 권력 투쟁이 격화되었다. 이성계는 정도전 등 신진사대부와 손을 잡고 개혁을 지지하며 권문세족에 맞섰다. 이 과정에서 그는 군사적 실권을 바탕으로 점차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하며 권력의 중심으로 다가섰다.

 

4. 위화도 회군의 내막

고려 말기, 조정은 외부의 침입과 내부의 권력 다툼으로 극도의 혼란에 빠져 있었다.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게 되는 결정적 분기점인 위화도 회군(1388년)은 이러한 혼돈의 정점에서 벌어진 역사적 대반전이었다. 회군의 배경과 과정, 주요 인물들의 역할을 차례로 알아본다.

 

1) 출병 명령이 내려진 배경 – 흔들리는 고려와 명의 도발

1388년, 요동 정벌 결정 직전의 고려는 내우외환으로 극히 혼란했다. 공민왕 사후 즉위한 우왕은 어린 나이와 끊임없는 출생 의혹(신돈의 아들이라는 설, 훗날 폐가입진의 빌미)으로 정통성이 약해 왕권이 불안정했고, 이는 최영과 같은 군부 실력자들이 국정 운영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배경이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성계는 왜구와 여진족 토벌로 명망 높은 신흥 군사 세력이었다.

 

결정적으로 1388년(우왕 14년), 명나라가 고려 영토였던 철령 이북에 '철령위' 설치를 일방적으로 통보하며 고려의 자주권을 심각하게 침해하자, 당시 군사적 실권을 쥔 문하시중 최영은 이를 기회 삼아 고구려 옛 영토 회복이라는 명분으로 요동 정벌을 강력히 추진했다. 우왕은 최영의 뜻을 받아들여 이성계(좌군도통사)와 조민수(우군도통사)에게 출병을 명했다. (최영은 팔도도통사로서 총지휘)

 

이성계는 '4 불가론'(소국이 대국을 치는 것의 부당함, 여름철 농번기, 왜구 창궐 우려, 장마철 활과 군량 문제)을 내세우며 백성의 고통을 가중시킬 것이라며 반대했지만, 최영은 '고려의 위엄 회복'을 내세워 이를 강행했습니다.

결국 왕명을 거역할 수 없었던 이성계는 무거운 마음으로 출병했으나, 압록강 하류 위화도에 이르러 장마와 군사 사기 저하 등 여러 악조건에 직면하며 회군을 결심하게 됩니다.

 

2) 최영과의 갈등과 회군 - 결심의 심리적 배경

이성계는 최영을 스승처럼 여겼으나, 요동 정벌을 둘러싼 갈등이 두 사람의 관계를 완전히 뒤흔들었다. 이성계는 출병 직전 최영에게 다시 한번 요동 정벌의 무모함을 설득하려 했지만, 최영은 “지금 이 순간, 우리가 요동을 되찾지 않는다면 고려는 명나라의 속국이 될 것이다”라며 강경한 입장을 보였다.

 

이성계는 요동을 향해 출병하면서 자신이 지켜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의 부하 장수들은 모두 요동 정벌의 무모함에 공감하고 있었고,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 역시 “이 길은 우리와 백성을 모두 죽이는 길입니다”라며 회군을 권유했다. 결정적 순간은 위화도에서 찾아왔다.


요동으로 출병한 이성계의 군대는 위화도에서 진을 치고, 본격적인 전투를 앞둔 상황이었다. 그러나 명나라의 군세는 강력했고, 고려군은 사기를 잃고 있었다. 이성계는 부하들과 회의를 열고 “우리가 진정 싸워야 할 적은 명나라가 아니라, 고려 내부의 부패와 최영의 무리한 정책이다”라며 회군을 결심한다. 이 결심은 단순한 전술적 후퇴가 아니었다.


이성계는 돌아가서 최영을 제거하고, 고려 왕권을 장악할 계획을 세웠던 것이다. 이제 이성계는 군사적 영웅에서 정치적 혁명가로 변모하게 된다.

 

3) 회군 과정에서의 주요 인물들 – 조준·정도전·남은의 역할

조준

조준은 이성계의 측근이자 군사 전략가였다. 그는 회군을 지지하며 “지금의 고려는 부패한 왕실과 최영의 오만이 나라를 병들게 하고 있다”라며 이성계에게 회군을 강력히 권유했다. 조준은 회군 이후 조선 건국의 개혁 정책을 입안하며, 이성계의 정치적 입지를 다지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정도전
정도전은 이성계의 정신적 멘토이자 조선 건국의 설계자였다. 그는 유학자로서 민본주의 사상을 설파하며 이성계가 새로운 왕조를 세우는 명분을 제공했다. 회군 직후 그는 이성계에게 “민심이 곧 천심이니, 백성을 위한 새로운 나라를 세우는 것이 곧 하늘의 뜻”이라며 조선 건국의 명분을 강조했다.

남은
남은은 이성계의 군사적 동지이자 충신이었다. 그는 회군 과정에서 병력의 배치와 병사들의 사기를 관리하는 역할을 맡았다. 회군 당시 남은은 이성계의 곁에서 군사적 조언을 아끼지 않았고, 회군 후에도 이성계 정권의 핵심 인물로 활동했으며, 훗날 왕자의 난에서는 (정도전, 조준과 함께) 이방원에게 제거되는 비운을 맞는다.

 

4) 위화도 회군(1388년)의 결과 – 고려 왕조의 몰락과 조선 건국의 서막

위화도에서 회군한 이성계는 빠른 속도로 개경으로 진격하여 정권을 장악했다. 그는 최영을 체포하여 유배 보낸 뒤 사사하고, 우왕을 '신돈의 자식'이라는 폐가입진(廢家立眞)의 논리를 내세워 폐위시켰다. 그리고 우왕의 아들인 창왕(재위 1388년~1389년)을 허수아비 왕으로 옹립했다.

 

그러나 이 역시 잠시의 명분 쌓기에 불과했으며, 이성계와 신진사대부 세력은 이듬해 창왕마저 같은 논리로 폐위시키고, 왕 씨 종친 중에서 가장 만만하다고 여겨진 공양왕(재위 1389년~1392년)을 새로운 왕으로 내세웠다. 이로써 이성계는 실질적인 최고 권력자가 되어 고려 조정을 완전히 장악하게 되었다.

 

이제 그는 조준, 정도전, 남은과 같은 급진개혁파 신진사대부들과 함께 본격적인 개혁 정치와 더불어 새로운 왕조 건국을 향한 발걸음을 내딛기 시작했다. 위화도 회군은 단순한 군사적 반란을 넘어, 고려 왕조의 몰락을 재촉하고 조선 건국이라는 새로운 시대를 여는 서막이었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이성계는 고려의 충신이자 장군에서, 역사의 흐름을 바꾼 혁명가이자 조선의 건국자로 거듭나게 되었다.

 


5. 주요 업적 – 조선을 설계한 개혁 군주, 태조 이성계

조선의 태조 이성계는 단순한 무장 출신의 건국자가 아니었다. 그는 새로운 왕조의 정치·사회·경제적 기반을 확고히 다지며, 조선이라는 신국가의 청사진을 그린 개혁 군주였다. 비록 재위 기간은 짧았지만, 그의 정책과 제도는 조선 500년 왕조의 기틀이 되었다.

 

1) 정치 체제 구축 - 유교적 통치 이념의 확립

태조 이성계는 고려의 불교 중심 통치에서 벗어나 유교적 통치 이념을 채택했다. 그 중심에는 정도전조준이 있었다. 이들은 성리학을 국가 이념으로 삼고, 군주 중심의 통치 체제를 정비해 나갔다.

 유교적 통치 이념 채택

정도전·조준 등 신진사대부와 함께 성리학적 유교 이념을 국가 운영의 근본으로 삼았다. 이성계는 ‘천명(天命)’을 받아 조선을 세웠다는 논리를 내세워 왕권의 정당성을 확립했다. 이를 통해 왕권 강화와 왕실의 도덕적 권위를 공고히 했다.

 숭유억불 정책

고려 말기, 불교는 부패와 사치로 타락해 있었다. 이성계는 불교 세력을 억압하고 유교를 숭상하는 정책을 펼쳤다. 수도 한양에 유교 사당을 세우고, 유학자를 대거 등용하여 관료 사회의 기반을 유교적 가치관으로 재편했다.

•「조선경국전」 편찬

정도전은 유교 이념을 바탕으로 한 정치·행정·군사·의례 체계를 정리한 조선경국전을 편찬하였다. 이 책은 조선의 정치적, 법률적 기초를 마련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조선경국전」은 후일 태종과 세종 때 「경국대전」으로 이어지며 조선의 법전 체계의 모태가 된다.

 의정부 - 6조 체제 확립

중앙 집권 체제를 공고히 하기 위해 의정부를 최고 정무 기관으로 삼고, 그 아래에 이·호·예·병·형·공의 6조를 설치했다. 각 조는 행정 실무를 분담하여 국가 운영 체계를 분명히 했다. 또한 사헌부와 사간원을 설치해 관료들의 비리를 감찰하고, 왕권을 견제할 수 있는 언론 기관을 정비했다.

 

2) 수도 계획과 국토 설계 - 한양 천도와 도성 건설

태조 이성계는 새로운 왕조의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 수도를 옮길 필요성을 절감했다. 1394년(태조 3년), 그는 정도전과 함께 새 수도를 한양으로 정하고, 본격적인 도성 건설에 착수한다.

한양 천도 배경

개경은 구 귀족 세력의 기반이었으며, 고려 왕조의 흔적이 짙게 남아 있었다. 한양은 지리적으로 삼남지방과 가까워 경제적 중심지로 부상할 가능성이 컸고, 한강을 통한 교통과 국방이 용이했다.

한성부 체제

수도 천도와 함께 수도 행정 체계를 정비하고 한양은 한성부로 개칭되었고, 이를 중심으로 지방 행정 체계가 재편되었다. 이는 후일 세종과 성종 때 전국적인 행정구역 정비의 기초가 되었다.

 도성 및 궁궐 건설

정도전은 유교적 이념에 따라 도성을 설계했다. 중심에 경복궁을 두고, 좌묘우사(左廟右社)의 원칙에 따라 동쪽에 종묘(왕실 제사), 서쪽에 사직단(국가 제사)을 배치해 유교적 정치 체계를 시각적으로 구현했다. 경복궁은 왕실의 상징이자 국가 통치의 중심지로 기능하게 된다.

 

3) 명과의 외교 및 대외 정책 - 실리 외교와 국제적 정통성 확보

조선 건국 초기, 이성계는 주변국과의 외교 관계를 안정시키는 데 주력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국가는 명나라였다.

명나라와의 외교(친명 정책)

고려 말, 원나라가 쇠퇴하고 명나라가 새롭게 부상했다. 이성계는 새로운 왕조의 안정을 위해 명나라에 사대의 예를 취하며 국호와 왕위 승인을 요청했다. 1392년, 명나라로부터 ‘조선(朝鮮)’이라는 국호를 재가받고, 이듬해(1393년) 왕위 계승을 승인받았다. 이는 조선이 명나라의 책봉을 받은 정통 국가임을 대내외에 공고히 한 조치였다.

조공-책봉 체제의 확립

이성계는 명나라에 주기적으로 조공을 바치며 실리 외교를 펼쳤다. 이를 통해 조선은 명나라의 선진 문물을 수용하고, 국제적으로 안정된 지위를 확보하며 내부적으로는 왕조의 권위와 안정성을 다질 수 있었다.

 

4) 사회·경제 제도 정비 - 과전법 실시와 군사 조직 개편

조선 건국의 경제적 기반을 마련한 핵심 정책은 과전법이었다. 이성계는 신진 사대부들의 경제적 기반을 마련하고, 구 귀족 세력의 대토지 소유를 견제하기 위해 1391년(공양왕 3년), 조준 등과 함께 과전법을 실시했다.

 과전법 내용

전국의 토지를 경기 지역에 한정하여 관료들에게 등급에 따라 수조권 형태로 나누어 주고, 농민들은 수확량의 일정 비율을 세금으로 납부하게 했다. 이는 신진 사대부들의 경제적 기반을 마련하는 동시에 권문세족의 토지 독점을 막아 새로운 권력 구조를 형성하는 데 기여했다.

 군사 조직 개편 및 국방 강화

태조는 군사적 기반을 강화하기 위해 의흥삼군부를 설치했다. 이는 중앙 군사 지휘부로, 군사적 통제권을 한곳에 집중시켜 왕권을 강화하는 체제였다. 또한 정도전 등의 주도로 사병을 혁파하려 했으나, 이는 왕자들의 반발로 완전하게 이루어지지는 못했고, 훗날 태종 대에 이르러 본격적으로 시행된다.

 호적 정비

인구 조사를 통해 호적을 정비하고, 이를 바탕으로 세금과 병역을 효율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기초 자료를 마련했다.

 

6. 에필로그 – 태조의 최후와 유산

고려의 무장이었던 이성계는 조선을 건국하며 왕좌에 올랐다. 그러나 그가 평생 쌓아 올린 왕권은 그의 아들들 사이에서 피비린내 나는 갈등으로 이어졌고, 그는 결국 자신의 아들 이방원에 의해 권좌에서 밀려나게 된다.

 

1) 제1차 왕자의 난(1398년) - 퇴위 후 이방원과의 갈등

태조 이성계의 퇴위는 단순한 권력 이양이 아니었다. 그 이면에는 그의 아들들 사이에서 벌어진 처절한 권력 투쟁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이성계는 조선을 건국한 후, 자신의 정통성을 이어갈 왕세자로 신덕왕후 강 씨 소생의 아들 이방석을 책봉했다. 이 결정은 이방원을 비롯한 한 씨 소생 아들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이방원은 자신이 조선 건국 과정에서 큰 공을 세웠다고 자부했으나, 이성계는 강 씨의 아들 이방석을 세자로 세우면서 방원의 입지는 급격히 위축되었다. 방원은 자신이 배제된 배경에 정도전이 있다는 판단을 하게 된다. 정도전은 유교적 이념을 바탕으로 재상 중심의 민본주의 국가를 구상하고 있었고, 이방원 강력한 왕권을 추구하는 인물로 비쳤다.


정도전은 이방원이 강력한 군사적 실력을 갖추고 있다는 점에서 그를 강력한 위협으로 인식했다. 결국 이방원은 무력으로 상황을 해결하기로 결심한다. 1398년, 이방원은 자신의 군사적 기반을 이용해 정도전, 남은, 심효생, 세자 이방석, 그리고 그의 형 이방번 한꺼번에 제거하는 제1차 왕자의 난을 일으킨다.

 

이 사건으로 신덕왕후 강 씨의 아들들은 모두 목숨을 잃었고, 이성계는 큰 충격을 받고 왕위를 물려주기로 결심한다. 그는 이방원이 아닌, 비교적 온화한 성격의 둘째 아들 이방과에게 왕위를 넘긴다. 이방과는 정종(1398~1400)으로 즉위했으나, 실질적인 권력은 이방원에게 넘어가 있었다.

 

2) 제2차 왕자의 난(1400년) 이방원의 완전한 권력 장악 

제1차 왕자의 난으로 왕위는 이방원의 형 정종(이방과)에게 넘어갔다. 하지만 실질적인 권력은 여전히 이방원이 장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권력 장악을 위협하는 또 다른 세력이 등장했다. 이방원의 형제 중 넷째 형 이방간이었다. 이방간은 이방원과 함께 제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정도전 일파를 제거하는 데 협력했으나, 이방원이 실권을 쥐게 되자 점차 불만을 품기 시작했다.

 

이방간은 자신이 군사적 실력을 쌓아 권력을 잡을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그는 군사적 세력을 규합해 이방원과의 정면 대결을 준비했다. 이방간의 의도는 정종(이방과)을 배제하고 자신이 권력을 쥐려는 것이었다.

 

제2차 왕자의 난 발생 과정

1400년, 조선 조정은 제1차 왕자의 난으로 인해 권력의 중심이 이방원에게 기울어진 상태였다. 그러나 이방간은 자신이 왕위 계승에 더 적합하다고 생각하고, 이방원의 군사적 독주를 견제하기 위해 군사를 동원했다.

이방간은 박포와 손을 잡고, 군사를 일으켜 한양성으로 진격할 계획을 세웠다. 박포는 제1차 왕자의 난 때 공을 세웠으나 이후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고 이방간에게 가담했다. 이방간과 박포는 군사를 모아 한양성을 기습하려고 했지만, 이방원은 이미 이를 간파하고 있었다.

 

이방원의 선제공격 : 이방원은 정보망을 통해 이방간의 움직임을 미리 파악했다. 그는 자신의 군사적 실세들을 동원해 이방간과 박포의 군대를 먼저 공격했다. 한양성 밖에서 벌어진 격렬한 전투에서, 이방간의 군대는 패배했고, 박포는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이방간은 함흥으로 도주했으나, 곧 체포되어 유배를 당하게 된다. 이후 이방간은 유배지에서 사망하며, 이방원의 권력 독점 체제가 확고해졌다.

 

정종의 입장 : 이 과정에서 왕으로 있던  정종(이방과)은 형제들 간의 전투에서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하지 못하고 이방원의 뜻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정종은 명목상의 왕으로 남아 있었지만, 실권은 이미 이방원이 장악한 상태였다. 결국, 정종은 왕위를 이방원에게 넘기고 퇴위하게 된다.

결과 : 제2차 왕자의 난이방원이 왕권을 완전히 장악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이 사건을 통해 잠재적 경쟁자들을 모두 제거했고,
왕위에 오를 명분을 마련하게 되었다. 이방원은 정종의 양위를 받아 조선의 제3대 왕 태종(1400~1418)으로 즉위하게 된다.

 

3) 이성계의 최후 – 아버지이자 왕으로서의 쓸쓸한 말년

퇴위한 이성계는 수도 한양을 떠나 함흥으로 물러났다. 함흥은 그의 고향이자 젊은 시절부터 군사적 기반을 쌓아온 곳이었다. 그러나 함흥에서의 생활은 결코 평온하지 않았다. 그는 자식들이 권력 다툼에서 서로를 죽이고 죽이는 참혹한 상황을 고향에서 지켜보며 날이 갈수록 쇠약해져 갔다.


특히 이방원이 주도한 제1차 왕자의 난으로 인해 자신이 가장 아끼던 막내아들 이방석이 살해된 사실은 그의 마음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이방원은 아버지 이성계를 함흥에 두고 자신의 왕권을 강화해 나갔다. 이성계는 함흥에서 자주 한양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뜻을 내비쳤으나, 이방원은 자신이 왕권을 장악하는 동안 아버지의 존재가 정치적으로 부담스러웠고, 이성계가 한양으로 돌아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태종은 자주 차사(差使)를 함흥으로 보내어 아버지와 아들 간의 불화를 풀고 태조를 환궁시켜 옥새를 얻고자 하였으나, 태조는 차사로 오는 이들을 보는 족족 활을 쏘아 맞혀 죽였고, 그로 말미암아 보낸 사람이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뜻의 함흥차사라는 말이 생겨났다는 이야기가 전해 온다. 

그만큼 두 부자 사이의 갈등은 깊고도 뿌리 깊은 것이었다.

 

1408년, 이성계는 병석에서 끝내 회복하지 못한 채 함흥에서 생을 마감했다. 그의 나이 73세였다. 태조 이성계는 죽기 전까지도 아들 이방원과의 깊은 갈등과 냉대에 상처를 안고 세상을 등졌다. 그의 시신은 함흥에서 한양으로 옮겨졌고, 건원릉(健元陵)에 묻히며, 조선 개국 군주로서의 생애를 마감하게 되었다.

그가 남긴 조선이라는 나라는 이제 그의 아들 이방원의 손에서 강력한 중앙 집권 체제로 나아가고 있었다.

 

4) 이성계의 유산 – 조선 500년을 설계하다

이성계는 비록 왕위에서 물러난 후 아들들의 권력 다툼을 막지 못했지만, 그가 세운 통치 체제와 국가 기틀은 후대 왕들에게 강력한 통치 기반이 되어 주었다. 태종은 아버지의 중앙 집권 체제 설계를 계승하고 더욱 강화했으며, 세종은 할아버지가 강조한 민본주의 정치 이념을 발전시켜 조선을 문화·과학의 강국으로 이끌어냈다.

 

이성계는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지만, 그가 설계한 조선은 500년 동안 이어지며 한국사의 근간을 이루는 국가로 자리 잡았다. 그가 남긴 민본주의 정치 철학, 군사적 통치 체제, 중앙 집권 체제는 후대 왕들이 기반으로 삼아 더욱 발전시킨 국가 운영의 근간이 되었다.


📚 참고 자료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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