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정조는 그를 조선 최고의 인재라 불렀고, 세상은 그를 ‘다산’이라 기억했다. 비록 고난과 시련의 길을 걸었지만, 그는 누구보다도 조선을 향한 깊은 애정을 품고 있었다. 유배지에서의 고독한 성찰과 끊임없는 글쓰기를 통해, 그는 백성을 위한 진정한 목민관의 길을 제시했으며, 그 자신 또한 그러한 삶을 실천하고자 했다. 동시에 조선의 사회와 행정을 혁신하고자 한 개혁가로서의 길도 걸어갔다.
다산 정약용이라는 한 사람의 삶이 조선의 역사에 남긴 깊은 흔적을 따라가 봅니다.
1. 실학의 거목, 정약용: 명문가의 탄생과 실학의 씨앗
정약용은 1762년(영조 38년),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남인 명문가인 나주 정 씨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자는 미용(美庸), 호는 다산(茶山)과 여유당(與猶堂), 본관은 나주입니다. 그의 아버지는 정재원, 어머니는 해남 윤 씨이며, 정약용은 이들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들 중에서는 셋째이자 (아버지 정재원의) 전체 아들 중에서는 넷째였습니다.
그의 위로는 이복형인 첫째 정약현, 그리고 친형(동복형)인 둘째 정약전과 셋째 정약종이 있었습니다. 이들 네 형제(정약현, 정약전, 정약종, 정약용)는 모두 학문에 뛰어나 "정문사자(鄭門四子) 또는 정 씨 사형제"라고 불리며 명성이 높았습니다.
특히 이복형인 첫째 정약현은 조선 천주교의 주요 창립 인물 중 한 명인 이벽의 누이동생과 혼인했습니다. 이러한 혼인 관계는 정약용 집안이 초기 천주교 공동체와 깊은 연관을 맺는 배경이 되었으며, 훗날 신유박해의 파장 속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됩니다.
또한, 정약현의 맏딸 정난주와 혼인한 황사영은 정약용의 조카사위였는데, 그가 일으킨 '황사영 백서 사건'은 훗날 정약용의 유배 생활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둘째 형 정약전은 <자산어보>의 저자로 유명하며, 셋째 형 정약종은 조선에서 천주교 박해가 본격화된 1801년(순조 1년) 신유박해 당시, 신앙을 포기하지 않아 결국 순교의 길을 걸었습니다. 정약용은 이러한 형제들과 함께 학문과 사상, 그리고 시대를 함께 고민하며 자랐습니다.
정약용이 태어난 해(1762년 영조 38년), 조선 정국은 큰 비극에 휩싸였다. 영조의 노여움을 산 사도세자가 뒤주 속에 갇혀 죽는 임오화변이 일어난 것이다(윤 5월). 이 충격적인 사건 직후, 그의 아버지 정재원은 벼슬을 내려놓고 낙향하였고, 그해 6월에 태어난 넷째 아들 정약용에게는 '귀농(歸農)'이라는 아호를 지어주었다. 벼슬을 탐하여 당쟁에 휘말리지 말고 농촌에 귀의하여 평안히 살라는 아버지의 깊은 뜻이 담긴 이름이었다.
이렇게 혼란스러운 정국 속에서도, 정재원은 나주 정 씨 가문의 선비로서 뛰어난 학문과 청렴한 성품을 지닌 인물이었습니다. (정약용의 가문은 본래 8대를 연이어 문과 급제자를 배출한 명문이었으나, 그의 직계 조부 대에 이르러 잠시 관운이 끊기기도 했다.) 아버지 정재원은 1762년 3월 생원시에 합격한 후에는 대과에 응시하지 않았는데, 출세에 큰 욕심이 없어 사돈인 채제공의 거듭된 권유도 사양할 정도였습니다.
아버지는 당파 정치의 굴곡을 겪으면서도 자식들에게 ‘참된 학문은 백성을 위한 것’ 임을 강조하며 올곧은 교육을 실천했습니다. 정약용이 성장한 시기는 영조와 정조의 탕평정치가 시행되던 때였습니다. 남인이던 그의 가문은 정치적 어려움을 겪으며 시대의 모순을 목도했고, 이는 정약용이 비판적 사고와 함께 현실 개혁의 필요성을 절감하며 실학적 시각을 키우는 자양분이 되었습니다.
그의 학문적 기반은 성호 이익, 연암 박지원, 담헌 홍대용 등 선구적 실학자들의 사상에서 뿌리를 내렸습니다. 이들은 모두 당대 조선의 병폐를 비판하고, 현실 정치와 민생의 개선을 주장한 인물들로, 정약용이 후일 ‘실학의 집대성자’로 불리게 되는 사상적 토대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성호학파의 영향을 받은 그는 실용주의와 백성 중심의 정치를 핵심 가치로 삼았고, 이는 훗날 『목민심서』·『경세유표』 등 수많은 저서에 고스란히 담기며, 실학자로서의 위대한 성과로 이어졌습니다.
명문가에서 태어났지만, 그는 단순한 특권의식에 머물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시대에 대한 책임감과 백성을 향한 따뜻한 시선을 품고 성장했습니다. 그의 지적 여정은 단순한 이론에 그치지 않았고, 어린 시절부터 실천적 지혜와 사회적 책임을 향해 나아간 한 사대부 소년의 출발점이었습니다.
📸 사진 설명 (왼쪽부터): 치원총서(다산박물관 소장), 여유당전서, 다산초당도(개인소장품)
• 치원총서: 스승의 가르침을 따라 황상이 가려 뽑아 놓은 총서, 정약용의 학문정신은 제자에게 이어졌습니다. 1736년 2월, 스승의 회혼례를 축하하러 강진에 온 제자 황상에게, 정약용은 붓·먹·책·담배대와 어비를 주며 마지막으로 “책을 놓지 말라”는 당부를 남깁니다.
• 여유당전서: 정약용은 성호 이익의 학통을 이어받아 방대한 저술을 남겼고, 각종 사회 개혁사상을 제시하며 조선을 새롭게 바꾸고자 했습니다. 문학·예술·과학·의학·정치·지리 등 다양한 분야에서 이룬 위대한 업적을 담은 이 전집은, 실학사상의 정수를 집대성한 대표 저서입니다.
• 다산초당도:『다산초당도』는 정약용이 강진에서 머물던 유배지 다산초당의 풍경을 조선 후기의 고승 초의선사가 그린 것으로 전해집니다. 두 사람은 학문과 사상을 주제로 교류한 인연이 있으며, 이 그림은 정약용이 학문에 몰두했던 공간의 정취를 서정적으로 담고 있습니다. (개인 소장)
📎 사진설명 출처 ※위의 설명은 모두 남양주시청 문화관광 남양주역사인물의 공식 설명을 인용한 내용입니다.
📎 이미지 출처: 남양주시청 문화관광 남양주역사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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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실학에 눈뜨다: 스승과 책에서 만난 새로운 세상
정약용은 어린 시절부터 뛰어난 학문적 재능을 보였지만, 당시 조선을 지배하던 성리학 중심의 고전적 사고에서 벗어나 실용적이고 백성 중심의 사고를 받아들이며 본격적으로 실학에 눈을 뜨게 된 것은 성호 이익을 비롯한 당대 실학자들의 사상과의 만남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의 사상은 특히 성호학파의 정신에서 깊은 뿌리를 내렸습니다. 성호 이익의 실사구시적 학문은 정약용의 개혁 정신에 중요한 기틀을 마련해 주었고, 연암 박지원과의 학문적 교류는 북학파 특유의 실용성과 현실 인식을 그의 학문에 더했습니다. 또한, 담헌 홍대용의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정신은 그의 기술적 창의성에 자극을 주었습니다.
비유하자면, 그의 실학사상은 뿌리는 성호 이익에게서, 자극은 연암 박지원에게서, 그리고 넓은 시야는 담헌 홍대용에게서 얻어 확장된 셈입니다. 이러한 영향 중에서도 특히 정약용의 학문 여정에 큰 전환점을 마련한 것은 성호 이익과 연암 박지원이었습니다.
이익은 성리학적 세계관을 넘어 실제 사회 문제 해결을 지향하는 현실주의적 접근을 강조했습니다. 정약용은 『성호사설』과 같은 저작을 통해 학문을 단순한 이론 너머, 백성의 삶과 정치 현실을 직시하고 개선하는 도구로 인식하게 됩니다.
연암 박지원은 문학적 상상력과 경제적 관점을 결합한 실학자로서, 정약용에게 실학의 새로운 스펙트럼을 보여주었습니다. 그의 빛나는 저서 『열하일기』는 당시 청나라의 발전된 문물과 실상을 생생히 담아 조선의 고루한 현실을 비판적으로 돌아보게 했고, 이는 정약용이 새로운 세계를 상상하고 혁신적인 사상을 받아들이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정약용이 이처럼 실학사상을 깊이 탐구하며 가장 깊은 관심을 기울였던 것은 바로 백성의 고단한 삶이었습니다. 그는 단지 이론을 탐구하는 데 그치지 않고, 당대 사회의 불평등과 빈곤의 현실을 어떻게 실질적으로 바꿀 수 있을지를 치열하게 고민했습니다.
이러한 실용주의적 시각과 백성을 향한 깊은 애정은 훗날 그의 정치철학과 방대한 개혁 구상의 핵심적인 밑바탕이 되었으며, 마침내 『목민심서』·『경세유표』·『흠흠신서』와 같은 위대한 저작들로 결실을 맺게 됩니다.
3. 정조와의 만남, 그리고 개혁의 현장
정약용의 삶에서 가장 극적인 전환점은 정조와의 만남이었다. 1789년(정조 13년), 식년시 문과에 급제한 정약용은 이미 이전 1783년에 선발되었던 '초계문신' 제도를 통해 정조와 깊은 학문적 교류를 이어가고 있었다. 문과 급제 후 승문원과 홍문관을 거치며 관직 생활을 본격화했고, 정조의 총애 속에 국정 개혁 실무에 깊이 관여하게 된다.
그는 법률과 형벌 제도, 지방 행정 개편 등의 분야에서 정조의 개혁 의지를 실현할 핵심 인물로 활약했다. 정조는 정약용을 단지 이론에 밝은 학자가 아닌, 현실을 바꿀 수 있는 실천적 지식인으로 깊이 신뢰했다. 이에 규장각 검서관, 경기 암행어사 등 중요한 직책을 맡겼으며, 초계문신으로서의 지속적인 학문 연마와 정책 토론을 통해 그를 개혁의 핵심 인물로 키워나갔다. 이를 통해 정약용은 학문을 넘어 조선 개혁의 실무 최전선에 서게 된다.
가장 상징적인 사례는 수원 화성 축성 사업이다. 정조는 1794년 정약용을 축성 기술 책임자로 임명했고, 정약용은 이 현장에서 과학과 효율, 실용을 결합한 조선식 성곽 건설을 시도했다. 그 중심에는 그가 고안한 ‘거중기’가 있었다. 거중기는 도르래 원리를 응용해 무거운 석재를 적은 인력으로 옮길 수 있게 한 기계로, 노동력 절감과 공사 기간 단축이라는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성과를 이끌어냈다.
정조는 정약용과 같은 인재를 통해, 조선의 근대적 개혁을 꿈꾸고 있었다. 정약용 또한 정조의 신임에 응답하듯, 법제 정비, 형벌 개혁, 지방행정 개편 등의 영역에서 실천 가능한 정책 구상을 이어갔다.
정조 시대에 정약용이 품었던 개혁 구상과 정책 대안들은 훗날 유배지에서 집필된 『경세유표』의 중요한 바탕이 되었으며, 그의 핵심 사상인 『여전론』·『정전론』·『탕론』 등도 이 시기 현실 참여와 고민 속에서 싹튼 것이었다. 이는 단순한 이론서가 아닌, 당대 조선을 바꾸기 위한 구체적 대안서이자 실학적 실천의 집약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개혁은 오래가지 못했다. 1800년, 정조의 갑작스러운 승하로 인해 정치적 후원자가 사라지자, 정약용의 개혁도 좌절된다.
이후의 시대는 남인을 배척하고 천주교를 탄압하는 보수 정국으로 흘렀고, 정약용은 결국 유배의 길에 오르게 된다. 하지만 정조와 함께했던 그 시절은, 유배지에서도 꺼지지 않은 정약용 개혁 정신의 불씨가 되었다.
조선의 판을 바꾼 왕, 정조 : 개혁의 칼로 역사를 다시 쓰다
아버지 사도세자의 비극적인 죽음, 멈추지 않는 정쟁의 소용돌이, 그리고 곪아 터지기 직전의 민생. 정조가 마주한 현실은 절망 그 자체였습니다. 이 혼란의 시기에 등장한 인물이 바로 조선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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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강진 18년, 유배지에서 다시 쌓은 사상의 탑
정약용이 도착한 곳은 전라도 강진.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이곳은 권력의 시선에서 벗어난 조용한 유배지였지만, 정약용에게는 인생의 두 번째 시작이자, 사상적 대작업이 펼쳐지는 거대한 지적 실험실이었습니다. 1801년(순조 1년) 신유박해로 처음 경상도 장기로 유배되었던 정약용은, 그해 겨울 황사영 백서 사건에 연루되어 더욱 먼 전라도 강진으로 이배 되어 총 18년의 기나긴 유배 생활을 이어갔습니다.
강진에서의 유배 생활 대부분, 특히 그의 학문적 성과가 꽃피운 다산초당에서는 약 11년을 보내게 됩니다. 이 시기는 그의 사상적 전환이 이뤄진 가장 중요한 때이자, 실학의 결정체가 집약된 공간이었습니다. 유배 초기의 그는 좌절과 고립 속에서 괴로움에 시달렸지만, 이내 마음을 다잡고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과 고독을 '글'로 바꾸기 시작합니다.
이 시기, 황상·이청·이한기 등 강진의 제자들은 그의 학문과 저술을 돕고 함께 성장하며, 다산학파의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정약용은 단순한 독서를 넘어, 백성의 삶을 변화시키기 위한 글쓰기를 시작했고, 바로 이 강진에서 실학의 집대성을 이루어냈습니다. 또한 그는 수많은 편지글을 통해 자신의 사상을 정리하고 후대에 전하고자 했습니다.
그중 하나는 아들에게 보낸 편지로, 이렇게 시작됩니다. “너희들은 가난하더라도 정직하고 근면하게 살아야 하며, 다른 사람을 해치지 말고 항상 마음을 바르게 하여라.” — 『다산시문집』에서 이러한 편지들은 단순한 훈계가 아닌, 실천적 삶의 철학이 담긴 교훈서로서 정약용 사상의 또 다른 한 축을 이룹니다.
강진 유배 시절, 그는 다음과 같은 기념비적인 저작들을 남기며 그의 사상을 집대성했습니다.
• 『목민심서』: 지방 행정과 공직자의 도리를 밝힌 실용행정서
• 『경세유표』: 조선 사회 전반의 제도를 재설계한 국가 개혁의 청사진
• 『흠흠신서』: 형벌 제도의 문제점을 분석하고 인권 중심의 사법 원칙을 제시한 저작
또한, 농업·과학기술·의학·철학 등 방대한 주제의 저술을 통해 실학사상을 집대성해 나갔습니다.
유배 기간 동안 초기 천주교 신앙의 열정은 다소 옅어졌을지 모르나, 오히려 그 경험은 그가 동서양의 다양한 사상을 비판적으로 수용하고 융합하여 독자적인 철학 체계를 구축하는 자양분이 되었습니다. 공자와 맹자, 주자학만이 아니라 불교와 노장 사상, 서양 과학과 실용 정신까지 — 정약용은 조선에서 가장 다층적인 지식인이자, 그 시대가 감당하지 못한 개혁가로 거듭난 것입니다.
이 시기 그의 학문은 단순한 이론이 아니라, 조선의 구조를 바꾸기 위한 설계도였습니다. 바로 이 강진에서, 조선 후기 최대의 실학사상이 그 실체를 드러내게 된 것입니다.
📸 사진 설명: 강진군 다산초당의 모습
• 강진 다산초당은 1801년 신유박해로 유배된 정약용이 머물던 공간으로, 총 18년 유배 생활 중 11년을 이곳에서 보냈습니다. 그는 이곳에서 방대한 실학사상의 대부분을 구상하고 집필하며, 조선을 바꾸기 위한 사상의 탑을 쌓아 올렸습니다.
📎 이미지 출처: 강진군청 강진문화관광 관광안내 포토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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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유배에서 돌아와 다시 세상을 보다
1818년, 정약용은 18년간의 유배를 마치고 고향 마재(지금의 경기도 남양주)로 돌아왔습니다. 이미 쉰 중반을 훌쩍 넘긴 나이였지만, 세상은 그를 외면했고 복권이나 관직 복귀의 길은 열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세상을 향한 애정과 사유를 놓지 않았습니다. 몸은 예전 같지 않았지만, 글을 통해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마음은 여전히 깊었습니다. 복권이나 관직 복귀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정치가 아닌 학문으로 세상을 바꾸는 길을 택합니다. 여유당이라 불리는 집에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그간의 연구를 정리하며 인생의 마지막까지 끊임없이 써 내려갔습니다.
여유당에서 그는 다음과 같은 중요한 저작들을 정리하거나 새롭게 남겼습니다:
• 『자찬묘지명』: 1822년 회갑 즈음에 자신의 일생과 사상을 반성하며 묘지명 형식으로 기록한 자필 글로, 정약용의 내면이 가장 깊게 드러난 문헌 중 하나입니다.
• 『마과회통』: 1798년 집필한 의서로, 홍역의 병증과 치료법을 체계적으로 정리. 유배 전의 저작이지만, 여유당에서 다시 정리되어 실학적 의학관의 한 정점으로 자리합니다.
• 『여유당전서』: 정약용이 남긴 방대한 저술들을 후대에 집대성하여 간행한 문집으로, 그가 말년에 직접 정리한 원고들이 그 기초가 되었습니다. 이후 후손들과 제자들에 의해 154권 76 책으로 간행되며, 실학사상의 보고로 자리 잡았습니다.
정약용의 집은 다시 하나의 작은 학당이 되었고, 그는 말년에도 후학을 키우며, 세상에 대한 비판과 애정을 놓지 않았습니다. 그는 더 이상 정치의 중심에 있지 않았지만, 백성을 위한 글과 가르침으로 조선을 깨우는 스승으로 남았습니다.
유배지에서 쌓아 올린 사상의 탑은, 말년의 정약용에게 ‘지혜의 나무’가 되었습니다. 그 나무 아래에서 사람들은 더 나은 세상을 꿈꿀 수 있었고, 정약용은 그 꿈을 지켜보는 조선의 철인으로 기억되었습니다.
1836년, 75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정약용은 글을 멈추지 않았고, 생각을 놓지 않았고, 사람을 잊지 않았습니다.
에필로그 - 다산, 이름보다 빛난 정신
정약용. 그의 본명은 ‘약용’이었지만, 우리는 그를 ‘다산’이라 부른다. 다산초당에서 머물며 수많은 저서를 남긴 탓도 있지만, 그 이름에는 단순한 장소 이상의 사상과 실천의 상징이 담겨 있다. 지식의 열매를 쉼 없이 맺는 나무처럼, 다산은 평생을 실천적 학문에 바쳐 조선의 사상 지형을 바꾸었다.
그가 남긴 저술은 무려 500여 권에 달한다. 행정, 법률, 군사, 교육, 의학, 농업, 천문에 이르기까지— 세상의 이치를 궁리하고, 백성의 삶을 염려한 흔적이 고스란히 책 속에 살아 있다. 백성을 다스리는 지혜를 담은 《목민심서》, 국가 경영의 청사진을 그린 《경세유표》, 공정한 형벌을 고민한 《흠흠신서》는 오늘날까지도 실용과 공정을 말할 때 빠지지 않고 언급되는 걸작이다.
그는 백성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았고, 지식인의 책임을 무겁게 여긴 사람이었다. 다산의 진가는 시대가 흐른 뒤 더욱 또렷해졌다. 조선 후기를 흔든 유배의 고난, 무너진 이상, 정조 사후의 외로움 속에서도 그는 붓을 들었다. 그 붓은 낡은 이론을 되풀이하지 않았고, 권력의 눈치를 보지도 않았다.
오직 사람을 위한 정치, 삶에 닿는 학문을 고민하며, 스스로에게 가장 냉정한 비판자가 되었다. 그는 마치 "나의 글이 먼 훗날 누군가에게 작게나마 쓰임이 된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라고 말하는 듯했다.
다산의 시대는 지나갔지만, 그 정신은 지금도 살아 숨 쉬고 있다. 백성을 위한 정치는 가능한가. 인간다운 세상은 어떻게 가능한가. 그가 남긴 물음표는 오늘도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지금도 누군가는 다산의 글을 펼치며 말한다.
“그는 이름보다 빛난 정신이었다.”
📚 참고 자료 출처
- 위키백과(한국어판)
- 한국민족문화 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원문자료 서비스
- 조선왕조실록 요약본(국사편찬위 제공 번역 요약문)
※ 모든 자료는 위의 공식 기관에서 제공한 원문 또는 요약본을 기반으로 내용을 재구성 정리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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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역사 + 콘텐츠 추천 |
🎥 영화 & 드라마
1. 유튜브 KBS 역사저널 그날 👉 유튜브에서 동영상 시청 가능
- KBS 역사스페셜: 김정호의 꿈, 조선의 네트워크를 구축하라 (2003. 2. 8 방송)
2. 유튜브 KBS 셀럽병사의 비밀 👉 유튜브에서 동영상 시청 가능
- KBS 학자의 고향 :
- 실학의 지평을 열다-다산 정약용 1부 (2011.4.17 방송)
- 하늘을 품은 형제들-다산 정약용 2부 (2011.4. 24 방송)
- 유배지에서 쌓은 금자탑 다산학-다산 정약용 3부 (2011.5.1 방송)
3. 《자산어보》 (2021, 영화)
- 배우: 설경구(정약전 역), 변요한(장창대 역)
- 내용: 정약용의 형 정약전이 유배지에서 백성들과 함께 지식을 나누며 자산어보를 집필하는 과정.
4. 《대통령 정약용》 (2022, SKY TV, TV영화)
- 배우: 김승우, 강영석, 이초희
- 내용: 조선의 실학자 정약용이 21세기 대한민국에 대통령으로 등장한다는 타임슬립 정치 판타지
5. 《이산》 (2007–2008, MBC )
- 배우: 이서진(이산 역), 한지민(성송연 역), 이순재(영조 역), 송창의(정약용 역, 67~77회)
- 내용: 정조의 개혁 정치와 인간적인 고민을 중심으로 한 대하사극. 정약용은 정조의 책사로 등장
6. 《성균관 스캔들》 (2010, KBS2 )
- 배우: 박유천, 박민영, 송중기, 유아인, 안내상(정약용 역)
- 내용: 정조 시대 성균관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청춘 성장 이야기. 학문과 사상을 둘러싼 갈등과 이상
7. 《구르미 그린 달빛》 (2016, KBS2 )
- 배우: 박보검, 김유정, 안내상(정약용 역)
- 내용: 정조 대의 배경 속에서 펼쳐지는 궁중 로맨스. 정약용은 궁궐 내 지식인으로 조연 출연
📖 책 추천
📚 아래의 도서들은 글의 주제와 연결되는 책들로, 개인적인 인상과 책 내용을 바탕으로 소개한 정보입니다.
1.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시리즈 (총 3권) – 이덕일 저
- 내용: 역사 만화 형식을 빌려 정약용과 형제들의 삶을 입체적으로 풀어낸 시리즈. 다양한 인물의 개성을 살려내며, 시대의 흐름 속 정약용의 인간적인 면모를 생생히 그려냅니다.
- 🔖 “역사가 이렇게 재미있어도 되는 걸까?” 청소년부터 성인까지 모두를 사로잡을 새로운 개념의 지식 만화입니다.
2. 《정조와 채제공, 그리고 정약용》– 박영규 저
- 내용: 조선 후기 르네상스라 불리는 정조 시대, 그 중심에 있던 정조·채제공·정약용의 교류와 우정을 따라가며 정치와 사상, 인간미가 어우러진 시대를 입체적으로 그려낸 인물 평전입니다.
- 🔖 조선의 가장 빛난 순간, 그 뒤에 있던 사람들의 이야기. 역사를 ‘인물’로 읽고 싶은 분께 추천합니다.
3. 《유배지에서 보내는 편지》– 정약용 저 / 박석무 편역
- 내용: 긴 유배 생활 동안 정약용이 자식과 제자들에게 남긴 편지를 현대어로 풀어낸 고전 편지집. 학자이자 아버지, 스승이자 인간으로서의 정약용을 가장 솔직하게 느낄 수 있는 기록입니다.
- 🔖 “마음이 머무는 편지한 줄.” 다산의 사상과 감성이 녹아 있는 고전, 그 첫걸음으로 가장 따뜻한 책.
4. 《정선 목민심서》– 정약용 저 / 다산연구회 편역
- 내용: 『목민심서』의 핵심 내용을 선별해 현대적 문체로 풀어낸 역주본. 방대한 고전을 읽기 어려웠던 독자에게 적합한 입문서이자, 오늘날에도 유효한 실학의 행정 철학이 담긴 실용 고전입니다.
- 🔖 “백성을 기르는 자는 먼저 그들을 사랑해야 하며, 사랑하지 않으면 다스릴 수 없다.”그리고 그 정신은 이렇게 이어집니다. “백성을 사랑한다는 것, 그 시작은 책임에서 온다.” 오늘의 공직자들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깊은 통찰을 건네는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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