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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조선시대 인물

명성황후 민자영 – 민비에서 조선의 마지막 황후가 되기까지

by misohistory 2025. 5. 12.

소녀 민자영은 어느 날 고종의 왕비 민비가 되었고, 마지막 조선의 황후 명성황후가 되었을 때는 이미 조선의 하늘은 무너지고 있었습니다. 그녀가 지키려 한 것은 나라였고, 그 대가는 생명이었습니다.

 

프롤로그 권력의 소용돌이 속에 선 왕후

조선이 무너져가던 시절, 권력의 소용돌이 속에 선 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고종의 왕비 민비였고, 어머니였으며, 조선의 마지막 황후 명성황후였습니다.

민자영. 훗날 명성황후로 불린 이 여인은, 단지 왕의 곁에 머무는 한낱 가냘픈 여인이 아니었습니다. 정국의 주도권을 쥔 정치인이었고, 외세의 그림자 속에서 나라를 지키려 했던 조선의 방패였습니다.

민자영은 경기도 여흥 민 씨 가문의 규수로 태어났습니다.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와 함께 여흥 민 씨 가문의 보호 아래 성장했습니다. 16세(열여섯)에 고종의 왕비(민비)로 간택되어 궁궐에 들어갔습니다. 그 순간부터 그녀는 조선의 왕비가 아니라, 정치의 중심에 선 여인이 되었습니다.

명성황후는 흥선대원군과의 권력 투쟁, 청·일·러 삼국 사이의 외교 줄타기, 그리고 끝내는 일본 낭인들의 칼날 앞에 무너져야 했습니다.  그녀의 죽음은 단순한 개인의 비극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조선 왕조의 붕괴를 알리는 신호탄이었고, 동아시아 역사의 방향을 바꾼 참극이었습니다.

그녀는 생전에 '민비'로 불렸고, 죽은 뒤 고종에 의해 '명성황후'로 추존되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부르는 '명성황후'라는 이름은, 그녀가 감당해야 했던 삶의 무게에 대한 뒤늦은 예우였습니다.

역사는 그녀를 때로는 ‘간섭하는 여인’이라 부르기도 했고, 때로는 ‘조선을 지키려다 희생된 황후’로 기록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 알고 싶은 것은, 그 모든 수식어 이전에 그 시대를 살았던 한 사람, 민자영의 시간입니다. 이제, 그 시간을 따라가 보려 합니다.


목차 (클릭하면 이동합니다)

1. 명문가 민 씨 집안에서 태어나다

1851년 양력 11월, 경기도 여주 여흥 민 씨 가문에서 한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이름은 민자영. 그녀는 조선에서 손꼽히는 명문가 출신으로, 아버지 민치록의 딸이자, 왕실과 인척 관계가 깊은 가문의 일원이었습니다.

민치록은 초혼인 오 씨 부인과의 사이에서 자식을 얻지 못한 채 상을 치른 후, 좌찬성 이규년의 딸 한산 이 씨와 재혼하였습니다. 두 사람 사이에는 1남 3녀가 있었지만 모두 어려서 세상을 떠났고, 민자영만이 살아남은 외동딸이었습니다.

 

학문에 관심 많은 소녀

어릴 적부터 자영은 아버지 민치록으로부터 학문을 배웠습니다.《소학》·《효경》·《여훈》등을 즐겨 읽었고, 특히 역사와 정치적 사건에 깊은 관심을 보였습니다. 그녀는 예전 왕실의 사례와 전쟁, 정치적 갈등 속에서 어떻게 국가가 다시 일어섰는지에 대해 특히 흥미를 느꼈습니다. 이것은 후일 조선의 국모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는 데 큰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아버지의 죽음과 변화의 시작

1858년, 자영이 여덟 살 무렵, 아버지 민치록이 병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미리 후사를 정해두지 않은 탓에, 자영과 어머니 한산 이 씨는 함께 3년간 시묘살이를 하였습니다. 그 시기 동안 자영은 아버지의 부재를 실감하며,《소학》·《효경》을 반복해 읽으며 효와 예를 배우고, 예법을 익히는 데 집중했습니다.  

 

1861년 (철종 12년) 민치록의 11촌 조카 뻘인 민승호가 양자로 입적되었습니다. 같은 해, 민승호는 음서 제도로 관직에 올랐습니다.  그는 민치구의 아들로,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부인 여흥부대부인 민 씨의 친동생이었습니다. 이로써 민자영과 고종의 관계는 더욱 긴밀해졌고, 자영은 민승호를 통해 정치적 상황에도 간접적으로 노출되기 시작했습니다.

 

민승호가 입적된 후, 자영은 어머니와 함께 여흥 민 씨 가문의 감고당에서 생활하며 학문과 예법을 익혔습니다. 그녀는 조용하고 학문에 뜻이 깊은 아이로 자랐으며, 후일 여러 기록에서 ‘단정하고 정숙하며, 남다른 기품을 지녔던 여인’으로 회자됩니다.

 

1863년 자영의 양오라버니 민승호의 누이인 여흥부대부인 민 씨의 아들 이희(고종)가 왕위에 올랐습니다. 이듬해 1864년 (고종 1년) 민승호는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고, 같은 해 홍문관 교리로 제수받았습니다. 이로써 민 씨 가문은 정치적 입지를 다지게 됩니다.

 

 왕비 간택, 운명의 서막

1866년 음력 1월, 대왕대비 조 씨(신정왕후)는 금혼령을 내리고 왕비 간택을 준비했습니다. 당시 민자영은 16세(열여섯)이었고, 왕비 간택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음력 2월 초간택이 시작되었고,  김우근의 딸, 조면호의 딸, 서상조의 딸, 유초환의 딸 등과 함께 재간택을 거쳤습니다. 삼간택이 이루어진 음력 3월, 민자영은 최종적으로 왕비로 간택되었습니다.

왕실에서는 고종의 혼사를 준비하며, 흥선대원군은 정치적 중립성을 기대할 수 있는 명문가 출신의 여인을 찾고 있었습니다. 당시 고종은 어린 나이였고, 대원군은 자신이 정치적 실권을 잡기 위해 왕비의 성품과 집안 배경을 중시했습니다.

한편, 안동 김 씨 가문에 빼앗겼던 세력을 되찾아오고자 했던 대왕대비 조 씨고종의 비를 자신의 친정 일가인 조면호의 딸로 정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이 역시 흥선대원군의 반대로 취소되어야 했습니다.

 

그렇게 조용하고 순종적인 성품을 지닌 여인으로 간택된 인물이 바로 민자영이었습니다. 당시 그녀는 16세(열여섯), 아직 소녀의 티를 벗지 못한 나이였습니다. 그러나 그 선택은 그녀의 인생을 바꾸었을 뿐 아니라, 조선의 운명을 바꾸는 서막이 되었습니다.


꽃무늬가 화려한 빨간색 예복을 입은 명성황후의 긴장된 표정으로 정면을 응시하는 모습입니다. 머리에는 꽃모양으로 장식된 커다란 화관을 쓰고 대수가 목까지 내려와 있습니다.
🎨이미지 설명: 1866년, 16세의 소녀 민자영이 조선의 왕비가 되던 순간의 모습입니다. 화려한 혼례복을 입고 정면을 응시하는 표정에서, 한 개인의 운명을 넘어 나라의 역사를 짊어지게 될 앞날이 엿보입니다. (본 이미지는 KBS 드라마 <명성황후>에서 영감받은 일러스트입니다.)

 


2. 조선의 왕비가 되다

흥선대원군의 며느리, 정치적 계산 속에 피어난 혼인

1866년, 민자영은 고종의 비로 간택되었습니다. 당시 고종은 15세(열다섯), 막 즉위한 지 3년이 지난 어린 임금이었고, 민자영은 그보다 한 살 많은 16세(열여섯)였습니다.

 

궁궐에서의 혼례는 단순한 왕실의 혼인이 아니었습니다. 이는 왕권을 장악한 흥선대원군의 정치적 계산이 깔린 중대한 결정이었습니다. 대원군은 자신의 권력을 위협하지 않으면서도, 가문이 약하지는 않은 여인을 원했습니다.

 

당시 민 씨 가문은 세도가문은 아니었지만, 왕실과 인척 관계가 전혀 없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아버지 민치록은 높은 관직에 오르지는 못했지만, 그의 집안은 오랜 세월 조정과 밀접한 관계를 맺어온 가문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자영은 어릴 적부터 조용하고 내성적이며 유순하다는 평을 들었고, 이 점은 대원군에게 더없이 매력적인 조건이었습니다. 그렇게 소녀 민자영은 조선의 왕비(민비)로서 궁궐에 들어섰습니다.

 

 고종의 아내이자 정치적 동반자

결혼 초기, 고종과 명성황후의 관계는 비교적 원만했던 것으로 전해집니다. 고종은 어리고 미숙했지만, 명성황후는 일찍부터 궁중 예법을 익히고 정치적 감각을 키워온 여인이었습니다.

 

초기에는 시아버지 흥선대원군이 정권을 장악하고 있었고, 고종은 그저 대원군의 그림자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명성황후는 흥선대원군의 전횡에 서서히 반기를 들기 시작했습니다.

 

대원군이 고종을 통제하는 상황에서, 그녀는 남편이 왕으로서 독립적인 권력을 행사하도록 돕고자 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그녀는 고종의 보호자이자 정치적 조력자로 성장해 갔고, 고종 또한 그녀의 정치적 감각과 결단력에 의존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명성황후는 고종에게 일본과 서구 세력의 위협을 알리고, 이를 경계하도록 유도했습니다. 이는 두 사람의 관계를 단순한 부부에서 정치적 동반자로 확장시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왕실의 후계 문제와 비극: 자녀의 출생과 죽음

결혼 초기, 궁궐 내에는 이미 귀인 이 씨(영보당 귀인 이 씨)라는 여인이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귀인 이 씨는 고종이 명성황후와 결혼하기 전부터 가까운 사이였고, 1868년(고종 5년)에는 고종의 서장자 완화군(이선, 완친왕)을 출산했습니다. 완화군의 출생은 고종의 첫아들이라는 점에서 큰 주목을 받았으나, 서자였기 때문에 왕세자 책봉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흥선대원군은 귀인 이 씨와 완화군을 총애하였고, 이들의 존재는 명성황후에게 정치적 부담이 되었습니다. 대원군은 서자인 완화군을 통해 고종과 명성황후를 견제할 가능성을 엿보았으나, 완화군이 1880년, 12세의 나이로 요절하면서 그 가능성은 사라졌습니다.

 

1871년, 명성황후는 고종과의 사이에서 첫 번째 아들을 출산했습니다. 이 아들은 왕실의 적자로서 기대를 모았으나, 태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습니다.

 

첫아들의 죽음은 명성황후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고, 그녀는 이 사건을 통해 더욱 강한 정치적 의지를 다지게 됩니다. 이 시기, 귀인 이 씨는 이미 완화군을 통해 고종의 신뢰를 얻고 있었고, 이는 명성황후가 정치적 입지를 더욱 공고히 다지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3년 후(1874년), 명성황후는 두 번째 아들 이척(훗날 순종)을 출산했습니다. 순종은 왕비와 고종의 유일한 생존 자녀이자, 조선의 마지막 황제가 되었습니다. 명성황후는 순종을 포함하여 4남 1녀를 낳았지만 모두 일찍 요절하고 성인이 된 자녀는 순종이 유일합니다.

 

순종의 출생은 명성황후의 입지를 더욱 강하게 만들었습니다. 왕실 내에서는 이제 순종이 왕실의 정통성을 잇는 유일한 후계자로 자리 잡았고, 이는 귀인 이 씨와 완화군의 입지를 약화시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순종은 태어날 때부터 병약한 체질로 알려졌습니다. 이로 인해 명성황후는 아들을 더욱 철저히 보호하며 자신의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해 갔습니다. 그녀는 아들이 왕위 계승자로 확고히 자리 잡을 수 있도록, 고종과의 관계를 더욱 견고히 하며, 대원군의 세력을 약화시키려 했습니다.

 

수동적 왕비에서 정치적 주체로

하지만 조용하고 유순하리라 여겼던 왕비는, 곧 전혀 다른 얼굴을 드러내기 시작했습니다. 궁궐의 생활에 익숙해질수록 그녀는 수동적인 왕비가 아닌, 조정의 흐름을 꿰뚫고 정세를 읽는 정치적 인물로 성장해 갔습니다. 명성황후는 더 이상 단순한 왕비가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점차 왕실의 실권을 쥐어가는 정치 주체로 자리 잡았고, 그 첫 번째 상대가, 바로 그녀를 궁궐로 들인 장본인이자 시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이었습니다.

 

한편, 흥선대원군은 고종이 즉위하기 전에 안동 김 씨 김병학의 딸이나 김병문의 딸 중에서 둘째 아들의 배필을 정하기로 비밀리에 약속을 맺었으나, 이를 뒤집고 민자영을 왕비로 간택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김병학 등 대원군을 지지했던 일부 안동 김 씨 세력이 등을 돌리게 되었고, 명성황후는 이 점을 이용하여 후에 흥선대원군을 견제할 때 안동 김 씨 일가와 힘을 모아 견제하려는 움직임을 보였습니다.  이는 후일 대원군이 실각하고 명성황후가 정권의 실세로 떠오르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근엄한 표정의 흥선대원군이 사람들이 어깨에 멘 교자에 앉아 이동하는 모습입니다. 주변에는 그를 따르는 신하들이 보입니다.
🎨이미지 설명: 막강한 권세를 누리던 흥선대원군의 위세. 이 모습은 며느리인 명성황후에게는 넘어야 할 거대한 산이자, 치열한 권력 투쟁의 서막을 알리는 상징적인 장면입니다. (본 이미지는 KBS 드라마 <명성황후>에서 영감받은 일러스트입니다.)


3. 정치의 중심에 선 명성왕후

흥선대원군과의 대립과 민 씨 세력의 부상

명성왕후가 정치의 중심에 나선 계기는 필연적이었습니다. 조정의 실권을 쥐고 있던 흥선대원군은 강력한 개혁과 철권통치를 통해 구체제를 뒤흔들고 있었으나, 점차 국왕인 고종과의 갈등이 표면화되기 시작했습니다. 명성왕후는 남편인 고종을 권력의 그림자에서 꺼내고자 했고, 동시에 대원군과는 다른 방식으로 조선을 지키려 했습니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여흥 민 씨 가문의 인물들을 조정으로 끌어들였습니다. 민승호를 비롯한 민 씨 일가가 점차 중용되기 시작했고, 이는 곧 ‘민 씨 정권’이라는 조롱과 함께 정치적 갈등을 키웠습니다. 흥선대원군은 이를 견디지 못하고 반격했고, 고종과의 사이도 점점 틀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대원군의 실각과 권력 장악

1873년, 고종은 마침내 친정 선언을 하며 흥선대원군의 섭정을 종결시켰습니다. 이 결정에는 명성왕후의 정치적 조언과 지지가 크게 작용했습니다. 대원군이 권력에서 물러나면서, 민 씨 가문이 본격적으로 권력을 장악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대원군은 물러난 이후에도 고종과 명성황후에 대한 적대감을 품고 있었습니다. 그는 고종과 명성황후를 폐위시키고 자신의 아들 이준용을 왕위에 앉히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이준용을 왕위에 올리고 섭정의 자리를 차지하려는 대원군의 음모는 조정 내 긴장을 고조시켰습니다.

 

1874년, 민승호의 집에서 의문의 폭발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이 사건으로 민승호와 그의 아들, 그리고 명성황후의 어머니 한창부부인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 사건은 대원군의 보복성 테러로 의심되었으나, 명확한 증거가 남지 않아 진실은 미궁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민 씨 세력의 핵심 인물이었던 민승호가 사망하면서,  명성황후의 정치적 기반은 일시적으로 흔들리게 했습니다. 하지만 명성황후는 이 사건을 계기로 더욱 정치적 의지를 굳히며, 자신의 입지를 더욱 공고히 다져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외교 노선의 정립과 조정 장악

이 무렵 명성왕후는 조선의 대외 정세에도 시선을 돌렸습니다. 일본이 메이지 유신 이후 급격히 세력을 키우고 있었고, 청나라는 여전히 조선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습니다. 명성황후는 흥선대원군이 일본에 지나치게 우호적이라고 판단했습니다.

 

이에 맞서 청나라와의 관계를 더욱 공고히 하려 했습니다. 이러한 외교적 선택은 단순한 왕비의 의견이 아니었습니다. 이는 곧 조선의 외교 노선이었고, 나라의 방향을 좌우하는 길이었습니다.

 

점차 조정의 주요 인사들도 명성왕후의 손에서 좌지우지되기 시작했습니다. 고종은 아버지 대원군의 그림자에서 벗어나 국왕으로서의 의지를 드러내기 시작했습니다. 그 곁에는 언제나 명성왕후가 있었습니다. 명성황후는 왕비였지만, 조정의 중심에 선 정치인이었습니다.

 

그녀는 조선을 지키기 위해 왕실의 실권을 쥐어갔고, 이 과정에서 그녀는 점점 더 많은 적을 만들어가고 있었습니다.


(왼쪽 그림) 흰 띠를 머리에 두른 구식 군인들이 무기를 들고 궁궐로 들이닥치자&amp;#44; 한 관리가 필사적으로 앞을 막아서는 모습입니다.(오른쪽 그림) 명성황후가 탄 가마를 멘 사람들이 주변을 경계하며 황급히 궁궐을 빠져나가는 모습입니다.
🎨이미지 설명: 1882년, 조선을 뒤흔든 임오군란의 긴박한 순간입니다. 왼쪽은 분노한 구식 군인들이 궁궐로 들이닥치는 일촉즉발의 상황을, 오른쪽은 그 칼날을 피해 가마에 몸을 싣고 황급히 피신해야 했던 명성황후의 긴박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본 이미지는 KBS 드라마 <명성황후>에서 영감받은 일러스트입니다.)


4. 국가의 혼란 속에서 살아남다

임오군란과 흥선대원군의 복귀

1882년 6월, 조선을 뒤흔든 임오군란이 일어났습니다. 신식 군대에 비해 차별을 받던 구식 군인들의 분노는 폭발했고, 궁궐로 들이닥친 폭도들은 명성황후의 처소를 습격했습니다. 그녀는 목숨을 구하기 위해 창덕궁을 빠져나와 몸을 숨겨야 했습니다.

 

이 혼란 속에서 흥선대원군은 민심을 수습한다는 명분으로 복귀했습니다. 대원군은 명성황후가 도망친 틈을 타 그녀가 죽었다고 선포하며 민 씨 세력을 제거하려 했습니다.

 

흥선대원군은 무위영, 장어영, 별기군을 폐지하고 5 군영을 복설 하였으며, 통리기무아문을 폐지하고 삼군부를 복설 하는 등 군제 개편을 단행했습니다. 그의 목표는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고 민 씨 세력을 완전히 제압하는 것이었습니다.

 

청나라 개입과 흥선대원군의 실각

대원군은 자신을 몰아낸 명성황후와 민 씨 세력을 제거하려 했고, 고종과 명성황후는 대원군의 재등장에 큰 위기를 맞이했습니다. 그러나 명성황후는 단순히 당하고만 있는 이가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청나라에 군사적 지원을 요청했고, 곧 청군이 한양에 입성하면서 대원군은 다시 실각했습니다. 결국 대원군은 청나라에 의해 납치되어 톈진으로 끌려갔습니다. 이 사건은 명성황후가 조선의 실질적인 정치 중심에 섰음을 보여주는 장면이었습니다.

 

갑신정변(1884년)과 일본의 개입

1884년 (고종 21년), 조선은 다시 한번 큰 혼란을 맞이했습니다. 개화파 인사들은 일본의 지원을 받아 민 씨 세력을 제거하려 했고, 갑신정변이 일어났습니다.

 

급진개화파가 청나라의 내정 간섭으로부터 자유로운 정치외교권 확보와 조선의 개화를 목표로 일으킨 정변이었습니다. 명성황후는 겨우 피신해 목숨을 부지했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은 일본이 조선 내 정치에 본격적으로 개입하는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흥선대원군의 귀국과 민 씨 세력의 공고화

1885년 초, 청나라의 원세개가 대원군의 귀국을 주선하며, 그는 8월에 조선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민 씨 세력이 여전히 권력을 장악하고 있었고, 대원군은 이전만큼 강력한 권력을 행사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다시 조정 내에서 자신의 세력을 키우려 했고, 명성황후와의 대립은 더욱 심화되었습니다. 그러나 대원군은 이전만큼 강력한 권력을 쥐지 못했고, 명성황후는 민 씨 세력의 지원을 통해 권력의 중심에 서 있었습니다.

 

거문도 사건과 러시아와의 외교 접촉

1885년, 영국이 거문도를 불법 점령하자,  명성황후는 이를 계기로 러시아와의 외교 접촉을 시도했습니다. 이는 일본의 경계심을 불러일으켰고, 일본은 조선 내 개화파를 적극적으로 지원하기 시작했습니다.

 

흥선대원군의 마지막 반격과 실패

1889년, 대원군은 일본의 지지를 얻어 다시금 조정을 장악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민 씨 세력의 견제와 고종의 강력한 반대로 이 시도는 좌절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대원군은 조정 내에서 더욱 고립되었고, 민 씨 세력은 더욱 강력해졌습니다.

 

동학농민운동과 청일전쟁: 격랑의 서막  

1894년, 조선 내부의 혼란은 극에 달했습니다. 동학농민운동이 발생하여 반봉건·반외세를 외치며 봉기했고, 명성황후는 이를 진압하기 위해 청나라에 군사적 지원을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일본은 이를 구실로 청일전쟁을 일으켰고, 청과 일본이 한반도에서 전투를 벌이게 되었습니다. 일본은 1894년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후, 조선 내에서의 영향력을 더욱 강화하기 시작했습니다.

 

친러 정책과 일본의 위협

1894년 동학농민운동과 청일전쟁이 겹치면서 조선은 더욱 혼란 속으로 빠져들었습니다. 명성황후는 일본의 영향력 확대를 막기 위해 친러 정책을 추진했습니다. 이는 일본에게 큰 위협이 되었고, 그녀는 점점 일본의 표적이 되어갔습니다.

 

일본은 조선을 무력으로 장악할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고, 그 중심에는 명성황후가 있었습니다.

 

을미사변을 향한 긴장: 비극의 전조

일본은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후, 조선 내에서 더욱 공격적인 태도를 보였습니다. 일본 공사 이노우에 가오루는 조선에 친일 내각을 구성할 것을 강요했고, 개화파 인사들을 통해 민 씨 세력을 견제하려 했습니다.

 

명성황후는 이러한 일본의 압박에 대응하기 위해 러시아와의 관계 강화를 추진했습니다. 이는 일본의 계획에 큰 위협이 되었고, 일본은 명성황후를 제거하기 위한 음모를 꾸미기 시작했습니다.

 

1895년 초, 일본은 조선 내에서 친일 내각을 구성하려는 시도를 강화했고, 명성황후는 이를 저지하기 위해 러시아 공사 베베르와 긴밀히 접촉했습니다. 이 시점에서 일본은 조선 왕실의 실권을 장악하기 위해 군사적 행동을 결심하게 됩니다.

 

모든 사건의 흐름은 을미사변이라는 비극적 결말을 향해 치닫고 있었습니다.


붉은 옷을 입은 명성황후가 궁녀들에게 둘러싸여 꿋꿋한 표정으로 앉아 있습니다. 오른쪽에서는 일본 낭인의 손이 그녀를 위협적으로 향하고 있고, 뒤에 선 궁녀들은 슬픈 표정으로 울고 있습니다.
🎨이미지 설명: 1895년 10월 8일 새벽, 조선의 국모가 시해되기 직전의 비극적인 순간입니다. 일본 낭인의 칼날 앞에서도 꿋꿋하게 정면을 응시하는 명성황후의 마지막 모습에서, 한 나라의 비극과 개인의 처절함이 동시에 느껴집니다. 이 장면 직후, 그녀는 역사상 가장 참혹한 최후를 맞이하게 됩니다. (본 이미지는 KBS 드라마 <명성황후>에서 영감받은 일러스트입니다.)


5. 을미사변 – 왕비의 죽음, 나라의 비극

경복궁 습격, 일본 낭인의 칼날

1895년 10월 8일 새벽, 경복궁의 어둠 속에 낯선 무리들이 들이닥쳤습니다.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가 조직한 자객들, 일본 낭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의 목표는 조선 왕실을 장악하고, 일본의 지배력을 확립하는 것. 그리고 그 첫 번째 표적은 명성황후였습니다.

 

미우라는 일본군과 일본 낭인들에게 명성황후를 시해할 것을 명령했고, 이들은 경복궁 안으로 침입했습니다. 궁궐 경비는 무력했고, 고종은 일본 낭인들이 궁궐을 장악하는 상황에서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한 채 침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명성황후는 흥복전으로 숨어들었지만, 이들은 궁녀와 시녀들 속에서 그녀를 끌어냈습니다.

 

비극의 순간 – 왕후의 최후

명성왕후는 일본 낭인들에게 끌려가 무참히 시해당했습니다. 그들의 칼날은 그녀를 난도질했고, 시신은 훼손된 채 불태워졌습니다. 왕후는 그렇게, 흔적조차 남기지 못한 채 사라졌습니다. 이 참혹한 시해사건은 조선 왕실의 붕괴를 알리는 신호탄이었습니다.

 

일본은 명성황후 시해사건을 통해 조선에 대한 실질적 지배권을 쥐려 했고, 사건 직후 친일 내각을 구성하며 조정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했습니다.

 

고종의 충격과 아관파천

고종은 왕비의 죽음에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일본이 조선의 정권을 장악해 가는 상황에서, 그는 더 이상 조선을 지킬 힘이 없음을 절감했습니다. 1896년 2월,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는 아관파천을 단행했습니다. 이는 일본의 압박에서 벗어나기 위한 최후의 수단이었습니다.

 

뒤늦은 추존, 민비에서 명성황후로

명성황후는 죽은 뒤에야 ‘민비’에서 벗어나 ‘명성황후’라는 시호로 추존되었습니다. 이는 그녀가 견뎌낸 고통과 죽음에 대한 최소한의 예우였지만, 조선이라는 국가는 이미 일본의 손아귀에 들어간 상태였습니다.

 

을미사변 이후 – 조선의 추락

을미사변 이후, 일본은 조선의 군제를 장악하고, 개화파를 앞세워 일본의 식민지 정책을 본격화하기 시작했습니다. 일본은 1896년 친일 내각을 구성하고, 조선 조정 내에서 반민 씨 세력을 중심으로 권력을 집중시켰습니다.

 

조선의 국운은 명성황후의 죽음과 함께 급속히 침몰하기 시작했고,  1897년 대한제국이 선포되었지만, 이는 조선 왕조의 마지막 몸부림일 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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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 누가 그녀를 죽였는가

1895년 10월, 명성왕후는 경복궁 깊은 곳에서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녀의 죽음은 낭인들의 칼끝에서 비롯되었지만, 칼을 들게 한 것은 일본이었습니다. 그리고, 조선이었습니다. 일본의 침략 의도와, 조선 내부의 분열된 권력, 외세에 기대어 살아남으려 했던 조정의 허약함이 그녀를 죽음으로 내몰았습니다.

 

고종은 그녀가 시해된 이후 큰 충격에 빠졌고, 이듬해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겼습니다. 세상은 그것을 ‘아관파천’이라 불렀습니다. 명성왕후는 죽어서야 황후의 칭호를 받았고, 궁궐의 역사와 백성의 기억 속에 ‘명성황후’라는 이름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사라진 정의: 가해자들의 무죄 판결

을미사변을 주도한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와 낭인들은 사건 직후 체포되었습니다. 일본 정부는 국제적 비난을 피하기 위해 형식적으로 요코하마 재판소에서 재판을 열었습니다.

1896년 1월 16일, 요코하마 재판소에서 그들에게 전원 무죄 판결을 내렸습니다. 이유는 간단했습니다. "그들은 국가를 위해 행동했다"는 것이었습니다.

 

미우라 고로를 비롯한 가해자들은 석방되었고, 조선 정부는 아무런 대응도 할 수 없었습니다. 이 사건은 일본이 조선 왕실을 무력으로 장악할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이었고, 조선의 독립과 국권은 더욱 위태롭게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엇갈린 평가: 외척인가, 국모인가

그녀에 대한 평가는 여전히 엇갈립니다. 왕권을 사유화하고 외척 정치를 일삼았다는 비판과, 외세에 맞서 조선을 지키려 했던 정치적 지도자였다는 재조명이 대립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녀가 조선의 황혼기에, 외세와 권력의 틈바구니 속에서 목숨을 걸고 싸운 인물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왕보다 더 뜨겁게 싸운 존재였습니다. 소녀 민자영은 열여섯의 나이에 조선의 왕비가 되었고, 비극의 역사 속에서 마지막 황후로 사라졌습니다.

 

궁궐의 화려한 그림자 뒤에서, 외로운 결심을 거듭하며 조선을 지키려 했던 한 여인. 그녀의 시간은, 단지 한 사람의 운명이 아닌, 나라의 운명이 함께 깃든 시간이었습니다.

 

 역사에 남은 이름

“그녀의 죽음은 비극이었지만, 그 삶은 조선을 지키려는 한 사람의 치열한 기록이었습니다. 명성황후의 시간은 끝났지만, 그 이름은 여전히 역사 속에서 살아 있습니다.”


📚 참고 자료 출처

※ 모든 자료는 위의 공식 기관에서 제공한 원문 또는 요약본을 기반으로 내용을 재구성 정리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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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역사 + 콘텐츠 추천

🎥 영화 & 드라마

🎬 아래의 영화, 드라마, 동영상은 글의 주제와 관련된 영상으로 개인적인 인상과 영상의 내용을 바탕으로 소개한 정보입니다.

 

1. 《불꽃처럼 나비처럼》(2009)
배우 : 수애(명성황후), 조승우(무명 역), 천호진(흥선대원군 역)
내용 : 명성황후와 그녀를 지키는 호위무사 무명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조선 말기의 정치적 혼란과 명성황후의 비극적인 운명을 그린 사극 멜로 영화입니다.
📌 명성황후의 인간적인 면모와 그녀를 지키려는 무명의 헌신적인 사랑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2. 《영웅》(2022)
배우 : 정성화(안중근 역), 김고은(설희 역), 나문희(조마리아 역)
내용 :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 사건을 중심으로 한 뮤지컬 영화로, 명성황후의 시해 장면이 중요한 배경으로 등장합니다.
📌 명성황후의 시해 사건이 안중근 의사의 독립운동에 영향을 미친 역사적 맥락을 보여줍니다.

 

3. 유튜브 KBS 역사저널 그날 👉 유튜브에서 동영상 시청 가능
• KBS 역사의 라이벌 대원군과 명성황후 (1994 방송)

• KBS 특별기획 110년 만의 추적 명성황후 시해사건- 1부 그들은 낭인이 아니었다 (2005 방송)

KBS 특별기획 110년 만의 추적 명성황후 시해사건- 2부 사죄, 그리고 진실 (2005 방송)

 KBS 역사스페셜 – 긴급입수! 러시아 비밀문서 명성황후 최후의 날 (2001. 11. 17 방송)

 KBS [역사 속 그날들/풀버전] 명성황후 시해, 일본은 왜 왕비를 노렸나? (2018.10.28 방송)

 

4. 유튜브 KBS Drama Classic  👉 유튜브에서 동영상 시청 가능  
•  [史극장] KBS 특별기획 드라마 명성황후 (2001 방송)   


📖 책 추천

📚 아래의 도서들은 글의 주제와 연결되는 책들로, 개인적인 인상과 책 내용을 바탕으로 소개한 정보입니다.

 

1.《조선의 국모 명성황후– 이은유 저
청소년을 위한 평전으로, 명성황후의 어린 시절부터 국모로서의 삶, 그리고 을미사변에 이르기까지의 일대기를 담고 있습니다. 일러스트와 함께 구성되어 있어 이해를 돕습니다. 명성황후의 정치적 역량과 외교적 노력, 그리고 자주독립을 위한 행보를 강조하며, 그녀의 인간적인 면모도 조명합니다.
🔖 명성황후의 생애를 쉽게 이해하고 싶은 청소년 및 일반 독자에게 추천

 

2.《명성황후: 최후의 새벽》– 쓰노다 후사코 저
• 일본 르포 작가 쓰노다 후사코가 을미사변의 진상을 파헤친 논픽션 작품으로, 명성황후 시해 사건의 전모를 실증 자료에 근거하여 서술합니다. 작가는 서술자로서 작품 전면에 나서 사실의 진위를 따지며, 일본인들이 저지른 범죄 행위를 객관적으로 성찰합니다. 기존의 명성황후 이미지를 재조명합니다.
🔖 명성황후 시해 사건의 배경과 일본의 관점을 알고 싶은 독자에게 추천

 

3.명성황후 이야기– 유홍종 저
• 명성황후의 비극적 일대기와 일본 국가권력의 범죄를 추적한 논픽션으로, 명성황후의 삶과 을미사변의 전말을 다룹니다. 명성황후의 정치적 행보와 인간적 면모를 조명하며, 일본의 조선 침략 과정과 함께 그녀가 살아온 전 생애를 서술합니다.
🔖 조선 말기의 정치적 흐름과 명성황후의 영향력을 알고 싶은 독자에게 추천

 

4.명성황후 제국을 일으키다– 한영우 저
• 명성황후의 죽음과 대한제국의 성립을 연관 지은 연구로, 명성황후의 죽음이 이후 역사에 미친 영향을 집중적으로 조명합니다. 방대한 의궤와 자료를 바탕으로 명성황후의 국장 진행 과정을 상세하게 소개하고, 황후의 죽음과 대한제국 성립 사이의 인과관계를 밝히는 데 초점을 맞춥니다.
🔖 개화기 조선의 정치적 역학 관계에 관심 있는 독자에게 추천

 

5.명성황후 시해의 진실을 밝힌다– 최문형 저
• 명성황후 시해 사건의 주모자와 배후 세력을 학문적으로 추적하여, 일본 제국주의가 명성황후 살해에 관여했음을 밝히는 자료를 제시합니다. 일본 정계 실세들의 움직임을 날짜별로 추적해 동북아시아의 국제정세와 황후 시해 사건을 재구성합니다.
🔖 을미사변과 그 이면의 정치적 음모를 알고 싶은 독자에게 추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