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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역사 인물 이야기

고산자 김정호의 여정 – 조선의 길을 다시 그린 대동여지도

by misohistory 2025. 5. 6.

“조선을 걷다, 조선을 그리다”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는 단순한 지도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지리적 정보를 넘어서, 조선의 모든 길과 산하를 직접 발로 걸으며
민중의 삶과 문화가 녹아든 하나의 살아 있는 기록이었습니다.

당시 조선은 불완전한 지도와 왜곡된 정보 속에 놓여 있었고,
여러 지역은 제 모습을 제대로 담지 못한 채 표기되곤 했습니다.

김정호는 바로 이 지점에서, 조선의 진짜 얼굴을 찾기 위해 스스로 땅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여정은 단지 길을 따라가는 것이 아닌,
조선의 공간을 새롭게 이해하고 그려나가는 역사적 행위였습니다.

그가 걸었던 길은 땅을 밟는 여정을 넘어, 조선의 미래를 그리는 과정이었고,
그 과정 속에서 탄생한 것이 바로 대동여지도입니다.

 

이제, 김정호가 걸어간 그 길을 따라 대동여지도를 통해 진짜 조선을 만나보세요.


1. 평민인가, 선비인가 - 김정호의 신분과 정체

김정호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많지 않습니다.
그는 대동여지도를 만든 위대한 지도 제작자이지만,
정작 그의 출생과 신분, 삶의 자취는 짙은 안갯속에 가려져 있습니다.

그의 이름 앞에는 관직도 없고, 호적 기록도 뚜렷이 남아 있지 않으며,
그에 대한 사료는 대부분 지도가 세상에 나온 이후의 일들에 한정되어 있습니다.

 

김정호는 1804년 무렵 태어난 것으로 추정되며,
1834년(순조 34년),『청구도』를 제작해 세상에 선보였습니다.
이는 그가 30세 전후의 젊은 시절부터 전국을 답사하며

지리에 깊은 관심을 기울여 왔음을 보여줍니다.
『청구도』는 훗날『대동여지도』로 이어지는 지도 제작 여정의 출발점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신분을 두고는 여러 설이 존재합니다.
한쪽에서는 그가 양반 가문 출신의 몰락한 선비였다고 보며,
또 다른 쪽에서는 정식 교육을 받지 못한 평민, 혹은 중인 계층의 실용 지식인이었다고도 합니다.
어떤 설은 도화서 화원 출신이었다는 가능성을 제기하고,
심지어 천민 출신이었다는 주장까지 존재합니다.

 

신분제 사회였던 조선에서 이처럼 다양한 설이 존재하는 것은,
그가 공식적인 체계 밖에서 활동한 인물이었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그는 국가의 명을 받은 관직자가 아닌,
스스로의 뜻으로 조선 땅을 걷고, 지도를 그린 사람이었습니다.

 

이 점에서 김정호는 어느 한 계층에 속한 사람이기보다는,
경계를 넘나든 실천적 지식인으로 바라보아야 할지도 모릅니다.

그에 대한 기록이 적다는 것은 아쉽기도 하지만,
그만큼 그의 행적은 곧 지도가 그의 자서전이 됩니다.
우리는 그가 남긴 지도와 주변의 단편적 기록을 통해
그의 정체를 하나하나 짐작해 볼 수밖에 없습니다.


2. 조선의 지리를 품다 - 대동여지도의 제작 과정

조선의 산과 강, 들판과 마을.
그 모든 지형을 하나의 지도에 담는 일은 결코 단순한 작업이 아니었습니다.
김정호는 책상 위가 아닌, 조선의 흙길 위에서 지도를 그렸습니다.
그는 지도 제작자가 아니라, 두 발로 조선을 기록한 여행자이자 역사가였습니다.

 

그의 첫 지도는 1834년경 간행된《청구도》로 추정됩니다.
이후 1861년, 마침내 *조선 전역을 22첩의 목판 지도에 새긴《대동여지도》*를 완성했습니다.
축척은 약 16만 분의 1로, 단순한 위치 정보에 그치지 않고
길의 굴곡, 산맥의 흐름, 물줄기의 생명력까지 담아낸 정밀한 지도였습니다.

 

김정호는 기존의《동국대지도》·《여지도》·《해동지도》등을 참고했지만,
무엇보다 직접 현장을 걷고, 지역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던 것이 핵심이었습니다.
해시계, 방위판, 줄자 같은 간단한 도구를 들고 거리를 재며
자신의 발걸음으로 지형을 측량한 것입니다.

 

그가 지도를 만든 이유는 단순한 정보 수집이 아니었습니다.
“백성이 길을 알아야 나라가 바로 선다”는 믿음 아래,
왕과 관리를 위한 통치용 지도가 아니라 백성을 위한 지도를 꿈꿨습니다.
이는 학문이 곧 권력이던 시대의 통념에 대한 조용한 도전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 작업은 결코 평탄하지 않았습니다.
지도는 곧 국가 기밀로 여겨졌고,
정밀한 지도가 외국에 넘어갈 경우 국방에 위협이 된다는 우려도 뒤따랐습니다.
김정호가 형조에 불려 갔다는 설이 존재하는 것도 그 때문입니다.

 

《대동여지도》는 22첩의 접이식 목판 지도 형태로 제작되었습니다.
목판에 새긴 뒤 인쇄하고 손으로 채색하여, 휴대성과 실용성 모두를 갖춘 종합 정보 지도가 되었죠.
산맥, 하천, 도로, 고을, 봉수망, 역참 등 조선의 행정·교통 체계가 총망라되어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놀라운 점은, 이 방대한 작업이 거의 혼자 이루어졌다는 사실입니다.
후원도 조직도 없이, 자신의 시간과 비용으로
지도 제작, 인쇄, 유통까지 도맡았던 그는
그야말로 ‘조선을 혼자 다시 그린 사람’이었습니다..

 

김정호에게 지도를 만든다는 건 곧 조선을 새로 정의하는 일이었습니다.
그의 발걸음 하나하나가 남긴 기록은 오늘날 우리가 만나는 ‘조선의 얼굴’이 되었고,
이제 우리는 그 지도를 통해 그가 본 조선, 그가 꿈꾼 조선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대동여지도-수채화-일러스트01대동여지도-수채화-일러스트02대동여지도-수채화-일러스트03

🎨 이미지 설명 : 영화《고산자, 대동여지도》영감을 받은 수채화 일러스트


3. 지도를 만든 죄 - 탄압과 투옥설

김정호를 둘러싼 가장 전설적인 이야기는,

“너무 정밀한 지도를 만들어 옥에 갇혔다”는 설입니다.
《대동여지도》가 국방상 위협이 될 수 있다는 이유로
조정이 그를 처벌했다는 이 전승은, 지금도 사람들의 상상력을 자극합니다.

 

실제로 조선 후기, 지도 제작은 매우 민감한 행위였습니다.
지형·도로망·군사 체계는 곧 국가 안보와 직결되었기 때문입니다.

19세기 중반, 서구 열강이 접근해 오고 흥선대원군이 집권하던 시기,
지리 정보는 철저히 통제되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시기에《대동여지도》가 세상에 나온 것이죠.

 

지도는 학문이 아니라, 정치의 대상이었습니다.
너무 자세한 지도는 외세 침입 시 조선의 약점을 드러낼 수 있었고,
《대동여지도》는 그런 우려의 한복판에 놓였습니다.

이런 배경 속에서, “김정호가 형조에 불려 갔다”는 이야기가 퍼졌습니다.
다만,『조선왕조실록』이나『승정원일기』등

공식 기록 어디에도 그의 투옥 사실은 남아 있지 않습니다.
즉, 투옥설은 역사적 사실이라기보다 후대의 설화에 가깝습니다.

 

그럼에도 이 전설은 쉽게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가 만든 지도는 서울부터 제주까지 전국의 도로망과 지형 정보를 망라한,
오늘날 지리학자들조차 감탄하는 수준의 작업이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작업은 체제에 대한 조용한 도전이자,
정보 독점에 맞선 민중 지식의 해방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국가의 후원 없이 혼자의 힘으로 만들어낸 이 지도가,
당시 권력층에겐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은 행위처럼 보였던 것이죠.

 

그래서 사람들은 상상했습니다.
“그는 틀림없이 핍박을 받았을 것이다.”
그 상상이 만든 전설, 바로 ‘지도를 만든 죄’입니다.

결국, 김정호의 투옥설은 사실 여부를 넘어서

그의 지도가 당대 권력조차 감당하지 못한 진짜 지식,
민중을 위한 기록이었다는 상징일지도 모릅니다.


4. 그가 남긴 지도들 -청구도·동여도·「대동여지도」

김정호는 단 한 장의 지도로는 조선을 담아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세 장의 서로 다른 지도를 통해, 조선을 겹겹이 그려냅니다.
그의 지도들은 단순한 지리 정보의 나열이 아닌, 각각 고유한 시선과 의도를 지닌 조선의 다면적 초상화라 할 수 있습니다.

 

1) 청구도(靑邱圖) - 김정호 지도 제작의 출발점

제작 시기: 1834년(순조 34년)
형식: 채색필사본/ 2책 또는 4책으로 구성/ 가로 22판, 세로 29층으로 나누어 편람 하기 좋도록 책 첩으로 만든 총 321면의 첩지도
지도 크기: 전국을 남북 29층, 동서 22 개판으로 구획하여 전국을 그렸다. 지도의 한 면은 남북 100리, 동서 70리 범위로 그렸으며, 축척은 약 16만 분의 1로 대동여지도와 동일함.

지도 구성 :

  • 제1 책 : 청구도제(靑邱圖題), 청구도 범례, 본조팔도주현도총목, 도성전도(都城全圖), 제주현도(諸州縣圖), 동방제국도(東方諸國圖), 사군삼한도, 삼국전도, 신라주현총도(新羅州縣總圖), 고려오도양계주현총도, 본조팔도성경합도, 군국총목표
  • 제2 책 : 본조팔도주현도총목, 도성전도(都城全圖), 제주현도(諸州縣圖), 청구도 범례
  • 모든 고을마다 호구수, 토지 면적, 군사의 총수, 세금으로 거두어들인 곡식의 총량을 기록함.
  • 한성까지의 거리 등을 기록하고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 있었던 곳에는 그 내용을 기록하였음.
  • 지도 내용에는 수계(水系)·지형·성곽·창고·역도(驛道)·봉수·교량·고개·섬·호구·시장·군병·토산(土産)·공납·풍속·능묘·사찰 등 그 지역의 특색을 나타내는 지지사항도 상세히 기록하고 있음.
  • 부록으로 군국총목표라는 제목의, 당시 행정구획별 남녀인구수·군보·곡부·방면·전답·민호 등이 기재된 표가 있음.
  • 산의 표현에서 크기나 겹쳐진 줄의 수로 지형의 높낮이의 일부 표현
  • 색인도(索引圖) 역할을 하는 본조팔도주현도총목이 수록되어 있어, 지도를 찾아가는 방법을 만들어 놓은 것으로, 경위선표에는 방안의 가로, 세로에 일련번호가 붙어 있으며, 각 지도의 방안에 쓰여있는 가로 세로의 일련번호를 비교하여 지도를 쉽게 찾을 수 있음.

《청구도》는 김정호가 남긴 지도 가운데 가장 이른 시기의 작업으로,

그의 지도 철학과 초기 지리 인식이 잘 드러나는 작품입니다.

'청구(靑邱)'는 청산과 구릉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땅, 즉 고대 한국을 상징하는 표현으로,

한반도 전역에 대한 포괄적 애정과 인식을 담아낸 이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지도는 조선을 단일 평면도 형식으로 담아내고 있으며,
단순한 외형을 넘어선 입체적인 산맥 표현, 고을 간 도로 연결,
그리고 정밀한 행정 정보의 수록을 통해 훗날《대동여지도》의 정교함으로 나아가는 출발점이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청구도》는 전통 회화식 산수 표현 기법과 조선의 실측 지리 요소가 절충된 지도로,
정보성과 조형성을 모두 갖춘 김정호만의 독창성을 보여줍니다.

지도학사적 가치뿐 아니라, 조선 후기에 지식인의 국토 인식과 민족적 자의식을 보여주는 상징적 지도로 평가받습니다.

 

①청구도(1834년)국립중앙도서관-소장②청구도(1834년)국립중앙도서관-소장③청구도(1834년)고려대학교-중앙도서관-소장

📸 사진 설명: ① 청구도(1834년) 왼쪽·가운데(국립중앙도서관 소장), ③청구도(1834년) 오른쪽(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 소장)

④청구도(1834년)고려대학교-중앙도서관-소장⑤청구도(1834년)고려대학교-중앙도서관-소장⑥청구도(1834년)고려대학교-중앙도서관-소장

📸 사진 설명:  청구도(1834년) 왼쪽·가운데·오른쪽(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 소장)

 

김정호가 1834년 제작한 전국 조선전도로 채색필사본이다.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청구도』는 전국을 남북 29층, 동서 22 개판으로 구획하여 전국을 그렸다. 지도의 한 면은 남북 100리, 동서 70리의 범위를 그렸으며, 축척은『대동여지도』(1861)와 동일한 약 16만 분의 1이다.『청구도』는 여러 질이 남아 있으며, 2책 혹은 4책으로 구성되어 있기도 하며, 지도의 묘사방법이 부분적으로 차이가 있다. 국립중앙도서관 소장된『청구도』는 2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보관상태가 좋고 구성이 뛰어난 지도책으로, 역사적·학술적 가치가 높다.

 

     김정호 1834년 제작한 전국 조선전도로 채색필사본이다.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 소장 『청구도』는 2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표제는 기·우(奇·遇)로 되어 있다. 다른『청구도』에 비해 산줄기 표현은 미약하고, 군현 경계는 흑색 점선으로 표현하였다. 도로는 적색 실선으로 상세하게 그렸다. 이 책의 특징은 황색, 적색, 회색, 청록색을 이용하여 군현별로 채색을 달리 하였다는 점이다. 보관 상태가 좋고 구성이 뛰어난 지도책으로 평가받고 있다.

📎 사진설명 출처  ※ 위의 지도 설명은 모두 국가유산청 국가유산포털의 공식 설명을 인용한 내용입니다.

 

📎 이미지 출처: 국가유산청 국가유산포털 국가유산검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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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동여도(東輿圖) – 걷고 또 걷다, 살아 있는 지형의 기록

제작 시기: 1856년 ~ 1861년경 (철종 7년~12년)
형식: 분첩절첩식 필사 본 채색 지도로, 총 23첩이며 수첩은 목록집이고,

제1첩부터 제22첩까지는 각 지역의 지리가 그려져 있다.

책 첩 형태로 가로 80리, 세로 120리를 한 개의 방 안으로 하여 만들어졌다.

지도 크기: 각 첩의 크기: 가로 약 20cm, 세로 약 30.5cm/ 전체 펼친 크기: 가로 약 3.2m, 세로 약 7m

 지도 구성:

  • 전국 지형을 남북 방향으로 길게 연결한 축선형 지도
  • 팔도별로 접을 수 있도록 제작되어, 휴대와 열람이 용이함
  • 산맥의 흐름, 하천의 곡선, 지형의 기복이 살아 움직이듯 정밀하게 묘사됨
  • 지도상의 거리는 제1첩 1면에 방안을 그려놓고 ‘방십리매 편’이라고 하여 매방의 실 거리가 10리임을 표시됨.
  • 고을 이름과 함께 영진(營鎭), 주현(州縣), 진보(鎭堡), 역도(驛道), 목소(牧所), 방면(坊面), 창고(倉庫), 봉수(烽燧), 능침(陵寢), 성(城), 도로(道路), 파수(把守)  등의 행정 및 통신 체계가 종합적으로 수록됨

동여도》는 김정호가 직접 전국을 답사한 후 그린 필사 지도로,
그의 대표작인《대동여지도》의 전신이자 실험적 기반이 된 작품입니다.

 

지도는 전체를 세로로 길게 구성하여, 한반도의 지형을 마치 지도를 따라 걸어가듯 탐색할 수 있는

독특한 방식으로 설계되었으며, 이로 인해 ‘지도 속 여행기’라는 평가를 받습니다.

각 도는 접히는 방식으로 나뉘어 있어, 분리·보관이 쉬우면서도

전체를 펼치면 한눈에 흐름을 읽을 수 있는 유기적 구조를 지녔습니다.

 

또한《동여도》는 제작 당시까지의 지도들과 달리,
중앙에서 제작된 지도의 권위에 기대지 않고, 민간 지식인의 실사 중심 방법론을 바탕으로 제작된 것으로,
지리학적 독립성, 민간 실학의 구현, 실증주의적 접근을 모두 담고 있습니다.

즉,《동여도》는 단순히《대동여지도》의 준비 단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김정호 지리학의 독립적 성취물이자, 조선 후기 민간 실학의 대표적 결과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동여도(19세기-중엽-서울대학교-규장각-소장)동여도(19세기-서울역사박물관-소장)

📸 사진 설명:  동여도(19세기 중엽,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 왼쪽 ②동여도(19세기, 서울역사박물관 소장) 오른

국립고궁박물관-소장품-동여도-펼침국립고궁박물관-소장품-동여도

📸 사진 설명: 동여도(1861년 이후,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왼쪽·오른


① 동여도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 19세기 중엽에 김정호가 제작한 것으로 추정되는 조선 전도(全圖)로, 필사본이다.『대동여지도』와 유사하게 23층의 절첩식(絶帖式)으로 제작되었다. 또, 전체적인 한반도의 윤곽, 산계(山界)와 수계(水界), 도로망 등 대부분의 내용이『대동여지도』와 일치하며, 범례에 해당하는「지도표(地圖標)」도『대동여지도』와 흡사하다.
『동여도』는 필사본으로 목판본보다 세밀한 기록이 가능했기 때문에『대동여지도』에 비해 약 7천여 개의 지명이 더 수록되어 있다. 특히『대동여지도』에서는 누락되어 있는 방(坊)과 면(面)의 지명이 상세히 수록되어 있다.
지도 내용을 보면, 각 첩마다 도로를 표시한 적색 실선의 두께가 다르고 도로를 표시한 적색과 산줄기를 표시한 녹색의 색감들도 첩 별로 다르게 나타나는데, 이는『동여도』의 필사과정에 여러 사람이 함께 참여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또 산계를 그린 회화적 솜씨나 글씨의 수준을 볼 때, 관에서 지도 제작에 관여했을 가능성도 높다.

 

② 동여도 서울역사박물관 소장: 동여도는 철종·고종 연간에 고산자(古山子) 김정호(金正浩)가 제작한 것으로 추정되는 필사본의 전국 채색지도이다. 병풍처럼 접고 펼 수 있는 분첩절첩식(分疊折帖式) 형태로 되어 있다. 총 23첩으로 맨 앞 첩은 목록집이고, 제1첩부터 제22첩까지는 각 지역의 지리가 그려져 있어 『대동여지도』와 유사한 체제를 갖추고 있다.
지도는 산천표시와 함께 주현별(州縣別) 경계선을 그어, 주현 간의 도로를 표시하였다. 그 바탕 위에 영진(營鎭), 주현(州縣), 진보(鎭堡), 역도(驛道), 목소(牧所), 방면(坊面), 창고(倉庫), 봉수(烽燧), 능침(陵寢), 성(城), 도로(道路), 파수(把守) 등을 표시하였다. 지도상의 거리는 제1첩 1면에 방안을 그려놓고 '방십리매 편(方十里每片)'이라고 하여 매방(每方)의 실제거리가 10리임을 표시하였다. 동여도는 지금까지 알려진 대동여지도의 필사본 중에서 가장 아름답고 정밀·정확하게 그려진 훌륭한 지도첩이다. 도화서에서 그린 지도제작 솜씨와도 버금가고 있어, 뛰어난 그림과 글씨, 채색 등이 18세기 후반기 조선지도 제작기술의 높은 수준을 잘 나타내는 대표적 작품 중의 하나로 꼽힌다. 

 

 동여도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목록 1첩, 지도 22첩으로 구성된 우리나라 전국 지도이다. 목록을 제외한 1~22첩을 펼쳐 위에서 아래로 순서대로 나열하면 전국 지도가 완성된다. 책 첩, 각 첩에 ‘東輿圖’라는 표제가 있다. 이 지도는 1861년에 제작된 김정호(金正浩)의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 목판 인쇄본으로, 바다 등은 채색하여 표현하였다. 이 위에 김정호가 1856년에서 1859년 사이에 제작한 채색 필사본인 동여도(輿地圖)에 수록된 지리정보를 필사하여, 동여도와 대동여지도가 한 지도에 표현되어 있다.

대동여지도는 목판에 새겨야 하기 때문에 많은 지명들이 생략되어 있으나, 필사본인 동여도는 조선 후기의 상황을 보여주는 육로, 해로 등의 교통로와 봉수 등의 군사시설과 같은 지리 정보가 표시되어 있다. 동여도는 목록 1첩과 지도 22첩으로 구성되어 있으나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는 목록이 따로 없어 이 유물은 동여도의 형식을 따른 것으로 볼 수 있다.

📎 사진설명 출처  ※ 위의 지도 설명은 모두 국가유산청 국가유산포털과 국립고궁박물관의 공식 설명을 인용한 내용입니다.

 

📎 이미지 출처: 국가유산청 국가유산포털 국가유산검색, 국립고궁박물관 소장품 동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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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 – 조선을 완성한 지도

제작 시기: 신유본-1861년 철종 12년(초판), 갑자본-1864년 고종 원년(재판)
형식: 목판 인쇄본 / 남북을 22첩으로 나누어 분첩절첩식 형태로 제작하여 모두 아래위를 맞추면 전국 지도가 됨
지도 크기: 지도의 각 첩에서 한 면 동서 80리, 남북 120리/ 목판은 2면, 양면에 판각되어 있음.

지도를 제작하는데 약 70장 내외의 목판이 사용된 것으로 추정.

22첩을 합치면 남~북 약 6.7m, 동~서 약 3.8m의 대형 지도가 됨. 축척은 약 16만 분의 1로 알려져 있음.

지도 구성 :

  • 한반도 전체를 남북으로 길게 연결한 축선형 구조
  • 20첩의 본도 + 부속 2첩(여지도, 방안지도 등)으로 구성
  • 해안선 도서, 산과 하천의 지형, 지방 군현 등이 실제와 유사하게 그려져 있음.
  • 각 군현 안에서는 영아(營衙), 읍치(邑治), 성지(城池), 진보(鎭堡), 창고(倉庫), 목소(牧所), 봉수(烽燧), 능침(陵寢), 방리(坊里), 고현(古縣), 고진보(古鎭堡), 고산성(古山城), 도로(道路) 등이 표시되어 있음.
  • 거리 단위 표기(10리 간격 방점), 지형의 고도차 표현, 군현 간 거리 측정이 가능.
  • 목판 인쇄 방식으로 제작되어 복제·보급이 가능

대동여지도》는 김정호 지도 인생의 정점이자,
한국 고지도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성취로 꼽히는 기념비적 작품입니다.

 

그 길이만 약 6.7미터에 달하는 대형 지도로,

조선 전역의 지형·지명·교통·군사 정보를 집대성한 이 지도는
"조선의 모든 지리 정보가 망라된 백과사전 같은 지도"이라 불릴 정도로 정밀하고 방대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이 지도를 통해 우리는 조선 후기의 지리학적 사고, 지식인 김정호의 사명감,
그리고 민중 중심의 실학정신을 동시에 만날 수 있습니다.

그는 답사를 통한 실측, 정밀한 기록, 전국 규모의 체계화, 그리고 보급 가능한 형태라는

모든 조건을 충족한 지도를 만들어냄으로써 "조선을 완성한 지도"를 남긴 셈입니다.

 

 

①대동여지도(조선시대)②대동여지도(1864년)③채색필사본-대동여지도

📸 사진 설명:  ①대동여지도(조선시대) 왼쪽, ②대동여지도(1864년, 경상남도 유형문화유산 거창박물관 소장) 가운데, ③채색필사본 대동여지도(19c말~20c초 추정, 국가등록문화유산 한국연구원 소장 ) 오른

④대동여지도(제주도-부분)⑤대동여지도⑥대동여지도

📸 사진 설명: ④대동여지도(제주도 부분) 왼쪽, 대동여지도 가운데·오른쪽/ ①   (성신여자대학교 박물관 소장)

 

     <대동여지도>의 여러 이본 중 성신여자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된 지도이다. 고산자(古山子) 김정호(金正浩, 생몰년 미상)가 1861년(철종 12)에 제작한 이 지도는 조선의 지도 발달에서 정점에 있으면서 고지도의 백미로 평가받고 있다.

지도 제작자인 김정호는 실학자이자 지리학자이다. 오직 지도를 만들고 지리지를 펴내는 데에만 일생을 바쳤다. 지리지로서 『여도비지』·『동여도지』·『대동지지』를 편찬하였을 뿐만 아니라『청구도』(1834)와 『대동여지도』를 제작하였다.『대동여지도』는 이전에 만들어진 지도와 현지답사를 바탕으로 여러 해에 걸쳐 제작한 것으로, 이전의 필사본 지도와는 다르게 목판본으로 제작함으로써 지리정보가 사회에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지도는 철종 12년(1861)에 처음 찍어낸 뒤 고종 1년(1864)에 다시 재판되었다. 초판과 재판의 간행 부수는 확실하지 않으나 현재 30여 점이 넘는 판본이 국내외에 소장된 것으로 볼 때 적지 않게 간행된 것으로 보인다. 19세기에 만들어진 축적 약 90만 분의 1의 『대동여지전도』는 이 지도를 축쇄 하여 만들어 보급된 것이다.

 

국가유산청 국가유산포털 국가유산검색 ①번 이미지 아래로 스코롤 하면 대동여지도 관련된 동영상이 있으니 참고하세요!

 

② 경상남도 유형문화유산 거창박물관에 소장된 지도이다. 대동여지도는 조선후기 지리학자인 고산자 김정호가 순조 34년(1834)에 자신이 만든 <청구도>를 27년 후에 증보 수정한 대축척 지도로 분첩절첩식지도첩이다. 형태를 보면, 남북을 120리 간격으로 22층으로 구분하고, 동서를 80리 간격으로 끊어 19판으로 구분했음. 대동여지도는 1861년에 처음으로 만들어 김정호가 목판으로 인쇄하였으며, 그 후 고종 원년(1864)에 수정본이 재간되었다. 박물관의 소장본은 1864년도 재간본으로 박물관 2층 중앙에 전시되어 있다. 

 

채색필사본 대동여지도: 국가등록문화유산 한국연구원 소장본 <대동여지도>는 신유본 <대동여지도>를 모사한 필사본이나 <대동여지도> 원본에 없는 우산도가 표시되어 있다. 우산도뿐만 아니라 북방 및 변방의 지리 정보(지명, 주기 등)가 적지 않게 추가되어 있으며, 당시 지식인의 영토 인식과 고민이 반영되어 있다. 

📎 사진설명 출처  ※ 위의 지도 설명은 모두 국가유산청 국가유산포털의 공식 설명을 인용한 내용입니다.

 

📎 이미지 출처 : 국가유산청 국가유산포털 국가유산검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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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여지도(1864년)대동여지도(1861년-철종-12)대동여지도(조선-고종-원년-1864)

📸 사진 설명:대동여지도(1864년,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 왼쪽, ②대동여지도 (1861년 철종 12년, 부산대학교 도서관 소장) 가운데, ③대동여지도(고종 원년 1864년,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유산) 오른쪽

 

<대동여지도>의 여러 이본 중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에 소장된 지도이며,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대동여지도>중 갑자본은 국내에 경상남도 거창박물관본이 있으며 국외에 미국 하버드대학교 옌창도서관에 소장되어 있어 매우 드물다. 특히 규장각 소장본의 경우 갑자본으로는 가장 상태가 좋으며 완질로 갖추어진 것으로 그 가치가 높다. 신유본에 비해 내용도 일부 수정된 것이 확인되어 김정호가 1861년 지도를 제작한 후에 내용을 지속적으로 수정하였음을 보여준다.

 

② 부산광역시 유형문화유산: 대동여지도는 초간 된 신유본(辛酉本)과 재간된 갑자본(甲子本)의 2종류가 전하는데, 부산대학교 도서관 소장 대동여지도는 1861년(철종 12)에 간행된 신유본에 속한다. 전체의 내용은 완벽하나 제1첩의 지도유설 2면과 수선전도(首善全圖)에 해당되는 도성도 1면은 필사되어 있다. 필사된 부분에서 오류가 발견되지만, 목판의 인쇄상태와 채색 솜씨, 그리고 보존상태 등이 양호하며 필사된 3면을 제외하고는 현재 보물로 지정되어 있는 3점과 꼭 같다.

대동여지도는 철종 12년(1861)에 고산자 김정호가 만든 우리나라 전국 지도로 최고의 선본이다. 총 22첩으로 되어 있으며 병풍처럼 접고 펼 수 있는 분첩절첩식 형태로 되어 있어 모두를 아래위로 맞추면 전국지도가 된다.

제1첩에는 지도유설, 경도 및 각 도별 人․物 수, 지도표, 경도오부지도 등이 수록되어 있고 제2첩부터 제21첩까지가 전국지도이다.

지도가 기밀 사항이라 다수를 인간(印刊:인쇄하여 책을 펴냄)할 수 없었던 당시의 사정으로 보아 대체로 5~6부 정도 인출되었다고 볼 때, 부산대학교 도서관 소장 대동여지도는 고산자 김정호가 직접 인간 한 모본이라는 점에서 문화유산적 가치를 가진다.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유산: 김정호가 남긴 3대 전국지도인『청구도』·『동여도』·『대동여지도』중의 하나이다. 김정호는 『청구도』를 4차에 걸쳐 수정 보완하였고,『동여도』를 2차에 걸쳐 제작하였으며,『대동여지도』도 필사본과 목판본이 있는데, 목판본은 신유본(1861)과 갑자본(1864)의 두 종류가 있다. 신유본은 비교적 많이 남아 있는데 갑자본은 알려진 것이 소수이다.

『대동여지도』는 각 층의 도엽(圖葉)을 연폭(連幅)으로 동에서 서로 길게 잇고 이것을 병풍식으로 접어 모두 22층으로 하는 분첩 절첩(分帖折疊)의 방법으로 제책 하여 한 질이 되게 하였다. 이때 책의 크기는 가로 20cm, 세로 30cm로서 당시 서지류(書誌類)의 크기와 비슷하게 만들어 마치 한 권의 책처럼 편리하게 되었다. 이로써『대동여지도』는 개개 층별로 동에서 서로, 남북으로 22층을 계속 인접하면 가로 4m, 세로 7m의 거대한 우리나라 전도(全圖)가 된다.

📎 사진설명 출처  ※ 위의 지도 설명은 모두 국가유산청 국가유산포털의 공식 설명을 인용한 내용입니다.

 

📎 이미지 출처 : 국가유산청 국가유산포털 국가유산검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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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나라를 세 가지 시선으로 그린 사람

《청구도》는 이상으로 출발한 그의 첫 발자국,

《동여도》는 실제로 땅을 걷고 기록한 여정의 지도,
《대동여지도》는 그 모든 여정을 집대성한 완성의 결과물입니다.

각기 다른 방식으로 조선을 바라보고 기록했던 김정호는,
한 시대의 지리학자가 아닌, 한 나라를 시각화한 기록자이자 철학자였습니다.

그가 남긴 지도들은 ‘조선을 보는 방식’ 그 자체를 바꿔놓은, 가장 위대한 시선의 흔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5. 김정호의 지도는 왜 위대했는가?

김정호의《대동여지도》는 단순한 지도가 아닙니다.
그것은 “조선을 누구의 눈높이에서 그릴 것인가”에 대한 선언이었습니다.
기존의 지도들이 권력 중심이었다면, 김정호는 백성의 시선으로 조선을 그린 지도를 남겼습니다.

 

 1) 권력 중심에서 백성 중심으로

기존 국토 지도는 궁궐이나 관청 중심, 군사·행정 용도가 많았습니다.
하지만 김정호는 고을, 도로, 역참 등 일상생활의 흐름을 중심에 두었습니다.
《대동여지도》는 백성을 위한 첫 지도로, 단순한 기술이 아닌 사상적 전환의 결과였습니다.

 

2) 걷는 지도 – 실측과 답사의 힘

김정호의 지도는 현장을 걸어 만든 지도였습니다.
산맥의 흐름, 도로의 곡선, 하천의 연결까지 문헌만으로는 불가능한 정밀함이 담겼습니다.
지금도 이 지도만으로 전국을 여행할 수 있을 정도의 실용성과 정확도를 갖추고 있습니다.

 

3) 보급을 위한 설계 – 분첩식과 목판 인쇄

《대동여지도》는 22첩으로 접을 수 있는 분첩식으로 제작되었고,

목판 인쇄 방식으로 다량 복제가 가능했습니다.
이는 김정호가 지도를 공공의 지식으로 보급하고자 했던 실용주의 철학을 보여줍니다.
그에게 지도는 “보는 것”이 아니라, “쓰는 것”이었습니다.

 

4) 기술과 철학이 만난 완성도

통일된 축척, 정교한 배열, 과학적 구성이 돋보이는

《대동여지도》는 조선 후기 실학 정신의 결정체입니다.
하지만 그 위대한 완성도 뒤엔 기술뿐 아니라,
“지도란 권력이 아닌, 삶을 담는 그릇”이라는 김정호의 철학이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그의 지도를 다시 펼쳐보는 이유는
그 안에 땅의 모양뿐 아니라, 시대를 앞선 정신과 민중을 향한 사랑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김정호는 지도를 만들었지만, 결국 한 시대의 가치를 그려낸 사람이었습니다.

 

“김정호의 지도가 위대한 이유는, 그 끝에 언제나 백성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 참고 자료 출처

※ 모든 자료는 위의 공식 기관에서 제공한 원문 또는 요약본을 기반으로 내용을 재구성 정리하였습니다.


 좀 더 깊이 빠져보고!

재미있게 역사 속 인물을 만나고 싶다면, 아래의 콘텐츠를 참고해 보세요~

오늘의 역사 + 콘텐츠 추천

 

🎥 영화 & 드라마

1. 《고산자, 대동여지도》(2016)
배우 : 차승원, 유준상, 김인권, 남지현, 신동미
내용 : 조선 후기, 지도 제작자 김정호의 삶을 모티프로 한 영화. 당시엔 금기로 여겨졌던 전국 지도를 민중을 위해 만들고자 한 김정호의 여정과 고난을 사실과 상상력을 결합해 풀어냈습니다.
📌 영화는 실제 역사기록을 바탕으로 하되, 김정호가 왜 대동여지도를 만들었는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드라마틱하게 보여줍니다.

 

2. 유튜브 KBS 역사저널 그날 👉 유튜브에서 동영상 시청 가능
• KBS 역사스페셜: 김정호의 꿈, 조선의 네트워크를 구축하라 (2003. 2. 8 방송)


📖 책 추천

📚 아래의 도서들은 글의 주제와 연결되는 책들로, 개인적인 인상과 책 내용을 바탕으로 소개한 정보입니다.

 

1. 《고산자》– 박범신 저
김정호의 삶을 다룬 가장 대표적인 역사 소설입니다. <고산자, 대동여지도> 영화의 원작이기도 합니다.

소설은 김정호의 인간적인 고뇌와 지도 제작에 대한 광기 어린 열정,

그 과정에서 겪는 시대적 아픔과 개인적 희생을 문학적인 상상력으로 생생하게 그려냅니다.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하되, 작가의 시선으로 김정호라는 인물을 깊이 있게 재해석했습니다.
🔖 김정호의 삶을 감동적인 스토리로 만나고 싶은 독자, 역사 소설을 즐겨 읽는 분,

영화 '고산자, 대동여지도'를 인상 깊게 보신 분에게 추천합니다.

 

2. 이재운 역사교양소설 대동여지도 上, 下》– 이재운 저
김정호의 생애와 조선 최고의 지도로 평가받는 '대동여지도'의 탄생 과정을 그린 장편 역사 소설입니다.

단순한 위인전을 넘어, 지도 제작에 담긴 김정호의 인간적인 고뇌와 꿈, 그리고 그를 도왔던 조력자들과의 관계 등을 입체적으로 보여주며 깊은 감동을 선사합니다. 역사적 사실에 작가의 상상력을 더해 김정호라는 인물과 대동여지도가 갖는 의미를 풍부하게 조명합니다.

🔖김정호의 삶과 대동여지도 제작 과정에 대해 깊이 알고 싶은 독자,

치밀한 자료 조사를 바탕으로 한 완성도 높은 역사 소설을 좋아하는 분,

한 분야에 대한 열정과 집념, 역경 극복에 대한 감동적인 이야기를 찾는 분들에게 추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