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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조선시대 역사

[조선왕조 3편] 세조이유 예종이황 성종이혈 업적 총정리

by misohistory 2025. 5. 31.

조카의 왕위를 빼앗은 피의 군주, 그러나 조선의 기틀을 다시 세운 강력한 왕 세조 이유(수양대군). 아버지의 위업을 잇기엔 너무나 짧은 시간을 살았던 비운의 왕 예종 이황. 그리고 마침내 할아버지가 시작한 조선의 법과 제도를 완성하여 태평성대를 연 모범 군주 성종 이혈.

 

이번 조선왕조 3편 세조이유 예종이황 성종이혈 업적 총정리에서는 계유정난이라는 거대한 비극 위에서 새롭게 시작된 조선의 질서와, 그 속에서 서로 다른 방식으로 나라를 이끈 세 왕의 이야기를 따라갑니다.
화려한 업적 이면에 숨겨진 갈등과 새로운 시대의 서막을 함께 만나보시죠.


프롤로그: 찬탈과 안정, 새로운 질서의 시대

가장 이상적인 시대는 가장 잔혹한 방식으로 끝이 났습니다. 어린 왕 단종의 비극 이후, 조선의 왕좌는 다시 한번 강력한 카리스마를 지닌 철권 군주의 차지가 되었습니다.

할아버지 태종을 닮았지만, 태종 이방원과는 또 다른 길을 걸어야 했던 세조 이유. 그는 조카의 피 위에 자신의 왕국을 건설했고, 그가 세운 질서는 아들과 손자로 이어지며 조선의 시스템을 완성시켰습니다.

찬탈이라는 오명 속에서 국가의 기틀을 다시 세운 세조 이유(수양대군), 그의 짧은 그림자였던 예종 이황, 그리고 마침내 조선이라는 거대한 그릇을 완성시킨 성종 이혈. 여기, 피의 역사 위에서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간 세 왕의 시대가 펼쳐집니다.

 


7. 세조 이유 (재위 1455~1468): 찬탈자 vs 위대한 군주, 두 얼굴의 왕

한 줄 평:
조카의 피 위에 왕국을 세웠으나, 누구보다 강력하게 나라를 설계한 군주.

7-1. 왕위 계승 배경: 칼로써 얻은 왕좌, 계유정난

문무를 겸비한 야심가, 수양대군

세조 이유는 세종대왕의 둘째 아들이자 문종의 동생으로, 어릴 때부터 학문과 무예 양쪽에서 모두 천재적인 재능을 보였습니다.
아버지 세종과 형 문종을 도와 수많은 국정 사업에 참여하며 자신의 능력을 증명했지만, 그의 내면에는 왕위에 대한 뜨거운 야망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형 문종이 일찍 승하하고 11세의 어린 조카 단종이 즉위하자, 조정의 실권이 김종서, 황보인 등 고명대신들에게 넘어가자 그는 위기감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피로 물든 밤, 계유정난(1453)

1453년, 수양대군은 마침내 칼을 뽑았습니다. 김종서가 안평대군과 결탁하여 역모를 꾸몄다는 명분을 내세워, 수양대군은 한명회, 권람 등 자신의 책사들과 함께 기습적으로 정변을 일으켜, 김종서와 황보인을 비롯한 단종의 핵심 지지 세력을 무자비하게 제거했습니다. 이 피비린내 나는 쿠데타가 바로 '계유정난'입니다.
이 사건으로 모든 권력은 수양대군의 손에 들어왔고, 단종은 이름뿐인 허수아비 왕으로 전락했습니다.

강요된 양위와 사육신의 저항

결국 1455년, 수양대군은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물려받는 형식으로 조선의 제7대 왕으로 즉위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왕좌는 시작부터 피의 저항에 부딪혔습니다.

1456년, 집현전 학사 출신이었던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응부, 유성원 등은 단종 복위를 비밀리에 모의했으나, 내부 고발로 사전에 발각되어 참혹한 고문 끝에 모두 처형당했습니다. 이들을 가리켜 '사육신'이라 부르며, 이들의 꺾이지 않는 절개는 후대에 길이 귀감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세조의 찬탈에 반발하여 벼슬을 버리고 평생 은둔하며 절의를 지켰는데, 이들은 김시습, 남효온, 이맹전, 조려, 원호, 성담수 등 일부 선비들을 '생육신'이라 일컫습니다.

세조는 이러한 반발 세력을 한 치의 용납 없이 철저하게 탄압했습니다. 상왕으로 물러났던 단종마저도, 그의 숙부인 금성대군 등이 주도한 단종 복위 운동(정축지변, 1456년)이 실패로 돌아가자 그 여파로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머나먼 강원도 영월로 유배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듬해인 1457년 (세조 3년) 10월, 결국 17세의 어린 나이에 사약을 받고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이처럼 수많은 왕족과 충신들의 피로 얼룩졌지만, 세조의 왕좌는 역설적이게도 이 처절한 피의 대가로 조선의 정치 체제를 이전과는 전혀 다른, 강력한 왕권 중심 체제로 탈바꿈하는 결정적인 분기점이 되었습니다.

 

▶ 더 깊이 알아보기:  수양대군 세조, 피로 물든 왕좌: 계유정난과 왕위찬탈 이야기

 

7-2. 주요 업적: 강력한 왕권 국가의 재설계

세조는 정통성에 대한 약점을 극복하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할아버지 태종을 모델 삼아 강력한 중앙집권 정책을 밀어붙였습니다.

 

통치 시스템의 정비

  • 6조 직계제 부활: 아버지 세종 시대에 의정부를 통해 이루어지던 합의 정치를 폐지(의정부서사제)하고, 왕이 6조의 업무를 직접 보고 받고 지시하는 6조 직계제를 부활시켰습니다. 이는 의정부와 대신들의 권한을 약화시키고 모든 권력을 왕에게 집중시키려는 강력한 조치였습니다.

  • 집현전 폐지와 언론 통제: 왕권에 비판적이었던 집현전을 '사육신 사건'을 계기로 완전히 폐지했습니다.
    이로 인해 세종 시대의 자유로운 학문 연구 분위기는 위축되었고, 그 기능은 예문관 등으로 일부 이전되었으나 이전만큼 활발하지는 못했습니다. (훗날 성종 대에 이르러 홍문관이 설치되어 집현전의 기능을 실질적으로 계승하게 됩니다.)
    또한 사헌부와 사간원 같은 언론 기관의 기능도 약화시켜, 왕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를 억눌렀습니다.

  • 백성에 대한 직접 통제 강화: 전국의 인구를 정확히 파악하고 세금과 군역 자원을 확보하기 위해 호패법을 다시 엄격하게 시행했으며, 다섯 가구를 하나로 묶어 서로 감시하게 하는 오가작통법을 도입하여 백성에 대한 국가의 통제력을 극대화했습니다.

국가 재정과 경제의 개혁

  • 직전법 시행(1466년): 기존 과전법 체제에서는 관리가 퇴직하거나 사망해도 그 가족에게 토지에 대한 권리(수조권)가 세습되어 국가 재정에 큰 부담이 되었습니다.
    세조는 이를 개혁하여 오직 현직 관리에게만 토지 수조권을 지급하는 '직전법'을 시행했습니다. 이는 국가의 재정 수입을 크게 늘리고, 왕이 관료들을 경제적으로 통제하는 힘을 강화하는 획기적인 개혁이었습니다.

  • 군사제도 개편 (5위 체제): 중앙군 조직을 의흥위, 용양위, 호분위, 충좌위, 충무위'5위(五衛)' 체제로 완벽하게 개편했습니다. 이는 군권을 왕에게 집중시키고, 지휘 체계를 일원화하여 국방력을 효율적으로 운용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법전과 문화 사업: 새로운 질서의 확립

  • 경국대전》 편찬 착수: 조선 왕조 500년의 기본 헌법이 될 불멸의 법전, 《경국대전》의 편찬을 시작했습니다. 비록 세조 재위 기간에는 완성되지 못하고, 이후 예종 대를 거쳐 성종 대에 이르러 최종적으로 완성되고 반포되었지만, 이는 조선을 인치(人治)가 아닌 법치(法治) 국가로 만들려는 위대한 작업의 시작이었습니다.

    이 외에도 국정 운영의 모범 사례를 모은 《국조보감》과 우리나라 전체 역사를 정리하는 《동국통감》의 편찬을 시작하는 등, 새로운 왕조의 기틀을 다지기 위한 문화 사업에도 힘을 기울였습니다.

  • 불교 숭상과 간경도감 설치: 조선의 억불 정책 기조와는 달리, 세조는 개인적으로 불교에 깊이 귀의했습니다. 이는 왕위 찬탈 과정에서 겪은 심적 부담감과, 일찍 세상을 떠난 맏아들 의경세자(예종의 형)에 대한 슬픔, 그리고 자신을 평생 괴롭힌 질병 등으로 인한 개인적인 신앙심과 깊은 관련이 있었습니다.

    • 원각사 창건(1465년): 한양 도성 내에 대규모 사찰인 원각사를 짓고, 오늘날 국보 제2호로 지정된 원각사지 10층 석탑을 세웠습니다.

    • 간경도감 설치(1461년): 불경을 한글로 번역하여 간행하는 기관인 간경도감을 설치하여, 《월인석보》 등 수많은 불교 서적을 언해(한글 번역)하여 간행했습니다. 이는 당시 유학자들의 거센 비판을 받았지만, 결과적으로 조선 전기 불교문화의 명맥을 잇고 한글 보급에도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7-3. 갈등과 최후: 피의 군주, 그 고통스러운 말년

세조의 강력한 통치 뒤에는 끊임없는 저항과 피의 숙청이 뒤따랐습니다. 그는 왕위 찬탈이라는 정통성의 한계 때문에 평생을 의심과 불안 속에서 살아야 했으며, 자신의 왕권에 비판적이거나 잠재적 위협이 될 수 있는 세력은 가차 없이 제거했습니다.
이러한 공포정치는 왕권을 유지하는 수단이었으나, 동시에 수많은 인재를 잃고 정치적 불안을 야기하는 원인이 되기도 했습니다.

 

이시애의 난 (1467년)

세조 말기, 중앙집권 강화 정책에 불만을 품은 함경도 지방 세력이 이시애를 중심으로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이들은 단종의 억울한 죽음을 명분으로 내세워 민심을 선동했고, 한때 함경도 대부분을 장악하며 세조 정권을 크게 위협했습니다. 비록 반란은 진압되었지만, 이는 세조의 통치에 대한 민심의 저항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었습니다

질병과 죽음

세조는 왕위 찬탈과 잇따른 숙청 과정에서 얻은 심적 고통과, 평생 그를 괴롭힌 지독한 피부병으로 인해 고통스러운 말년을 보냈습니다. 1468년, 병세가 악화되자 둘째 아들 예종(해양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이듬해 51세의 나이로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는 죽는 순간까지 신숙주, 한명회와 같은 원로대신(원상)들에게 어린 왕의 보필을 간곡히 부탁했습니다.


8. 예종 이황 (재위 1468~1469): 짧은 재위, 그러나 조선 정치의 분기점을 남긴 왕

한 줄 평:
강력한 아버지와 위대한 조카 사이, 시대를 잇는 다리가 된 비운의 군주.

8-1. 왕위 계승 배경: 준비되었으나 허락되지 않은 시간

형의 죽음으로 얻게 된 왕세자의 자리

예종 이황은 세조의 둘째 아들이었습니다. 본래 왕위는 문무를 겸비했던 형 의경세자(덕종으로 추존)의 몫이었으나, 1457년 그가 20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하면서 차남이었던 예종(당시 해양대군) 새로운 왕세자로 책봉되었습니다.
그는 세자 시절부터 총명함을 보여주었으며, 아버지 세조를 대신해 정무를 처리하며 일찍부터 통치 경험을 쌓았습니다.

 

너무 짧았던 1년 2개월의 통치

1468년 세조가 승하하자, 예종은 19세의 나이로 조선의 제8대 왕위에 올랐습니다. 그는 아버지 세조의 강력한 정책 기조를 이어받아 나라를 안정시키려 했으나, 즉위할 때부터 이미 그의 건강은 심각한 상태였습니다.
결국 그는 자신의 뜻을 제대로 펼쳐보지도 못한 채, 재위 1년 2개월 만인 1469년 11월, 20세의 젊은 나이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8-2. 주요 정치 흐름: 훈구 세력의 대두와 새로운 갈등의 시작

예종의 짧은 재위 기간은, 그 자체의 업적보다는 이후 성종 시대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단서들을 남겼습니다. 특히, 세조를 왕으로 만드는 데 공을 세운 '훈구공신' 세력이 조정의 실세로 완전히 자리 잡는 시기였습니다.

세조 시대 정책의 계승과 정비

  • 《경국대전》 편찬 지속: 아버지 세조가 시작한 조선의 헌법, 《경국대전》 편찬 작업을 계속 이어나갔습니다.
    특히 이미 완성된 호전(戶典, 재정 관련 법)의 일부 조항을 현실에 맞게 수정하여 시행하는 등, 법률 체계의 실용성을 높이는 데 기여했습니다.
    하지만 예종의 이른 승하로 그의 시대에 완성되지는 못했고, 이 위대한 작업은 성종 대에 이르러 최종적으로 반포하게 되었습니다.

  • 재정 질서 확립 시도: 관리들이 자신의 토지(직전)에서 정해진 것보다 더 많은 세금을 거두는 폐단을 바로잡고, 권력자에게 뇌물을 바치는 '분경' 행위를 엄격히 금지하는 등 국가 기강을 다잡으려 노력했습니다.

  • 국방 강화 시도: 세조 시대에 확립된 5위 체제를 기반으로 군사 제도를 점검하고, 북방 여진족의 위협에 대비해 병법을 논의하거나 군사 훈련을 강화하는 등 국방력 유지에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그러나 이 역시 건강 문제와 짧은 재위 기간으로 인해 큰 성과로 이어지지는 못했습니다.

 

훈구 세력의 팽창과 남이의 옥사

예종이 병약했기 때문에, 할머니인 정희왕후수렴청정의 형태로 국정에 깊이 관여했습니다. 자연스럽게 세조 시대의 공신이었던 신숙주 등 훈구 세력의 힘은 더욱 막강해졌습니다.

특히, 예종의 장인이었던 한명회는 자신의 딸 장순왕후(예종의 첫 번째 왕비, 세자빈 시절 사망하여 추존됨)를 통해 외척으로서의 지위까지 확보하며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습니다.

  • 남이의 옥사(1468년): 이러한 상황 속에서, 예종이 즉위하자마자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합니다.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며 영웅으로 떠오른 젊은 무장 남이가, 유자광 등의 모함으로 역모죄에 몰려 억울하게 처형당한 것입니다.

    '남이의 옥사'는, 막강한 권력을 쥔 훈구 세력이 자신들의 힘에 위협이 될 만한 신진 세력을 어떻게 제거하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었습니다. 이는 훗날 새로운 정치 세력인 '사림'훈구파와 대립하게 되는 갈등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8-3. 이른 죽음과 의외의 왕위 계승

갑작스러운 승하와 후계 문제

1469년, 예종 이황이 갑작스럽게 승하하자 왕위 계승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예종에게는 아들 제안대군이 있었지만, 그의 나이는 불과 4살이었습니다. 조정의 모든 권력을 쥐고 있던 정희왕후한명회를 비롯한 훈구 대신들은 중대한 결정을 내립니다.

 

새로운 왕의 탄생, 성종 이혈

그들은 예종의 아들 대신, 예종의 형이자 일찍 죽은 의경세자(덕종)의 둘째 아들인 자을산군(성종 이혈)을 새로운 왕으로 지목했습니다. 당시 예종에게는 아들 제안대군이 있었으나 나이가 너무 어렸고, 의경세자의 맏아들 월산대군은 병약하다는 이유로 제외되었습니다.

결국 정희왕후와 한명회 등은 
형식적으로는 성종을 예종의 양자로 입적시켜 왕위를 잇게 하면서도, 실제로는 세조의 맏아들인 의경세자의 혈통을 잇는다는 명분을 모두 취하는 방식으로 이 이례적인 계승을 성사시켰습니다.

특히, 새로운 왕이 될 성종은 당시 조정의 최고 실력자였던 한명회의 사위였습니다. 이 왕위 계승은, 이후 조선 정치가 훈구 세력의 막강한 영향력 아래에서 시작될 것임을 예고하는 것이었습니다.


멀리 수많은 고층 빌딩이 보이고 초록으로 우거진 나무들로 둘러싸인 창경궁 명정전 전경 사진으로 성종 15년에 지어졌습니다.
📸 사진 설명: 창경궁 명정전 전체 전경으로 명정전의 명정은 '정사를 밝힌다'라는 뜻으로 왕의 즉위식, 신하들의 하례, 과거시험, 궁중연회 등 중요한 국가 행사를 치르던 곳입니다. 명전전은 1484년 성종 15년 지어졌고,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1616년(광해군 8년)에 재건되었습니다. 현재 궁궐의 정전 가운데 가장 오래된 건물이며, 1985년 국보로 지정되었습니다.

 

📎 이미지 출처 및 더 보기: 국가유산청 궁능유적본부 궁능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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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성종 이혈 (재위 1469~1494): 유교 정치의 틀을 완성한 모범 군주

한 줄 평:
조선이라는 거대한 그릇을 완성했으나, 비극의 씨앗을 남긴 군주.

9-1. 왕위 계승 배경: 훈구 세력이 선택한 어린 왕

준비되지 않은 즉위

성종 이혈은 세조의 손자이자, 일찍 요절한 의경세자(덕종)의 둘째 아들이었습니다. 숙부인 예종 이황이 갑작스럽게 승하했을 때, 그에게는 아들 제안대군이 있었지만 나이가 불과 4살이었습니다.

왕위 계승을 논의하던 자리, 당시 조정의 최고 실권자였던 정희왕후(성종의 할머니)와 한명회(성종의 장인)는 예종의 아들이 아닌, 자신들의 통제하에 두기 용이한 13세의 어린 자을산군(성종 이혈)을 새로운 왕으로 선택했습니다.

이는 이례적인 계승 방법으로 형식적으로는 성종 이혈을 예종의 양자로 입적시켜 왕위를 잇게 하면서도, 실제로는 세조의 맏아들인 의경세자의 혈통을 잇는다는 명분을 모두 취하는 방식으로 왕위 계승을 성사시켰습니다.

 

할머니의 수렴청정과 훈구의 시대

성종이 어린 나이에 즉위했기 때문에, 할머니 정희왕후가 조선 역사상 최초로 대왕대비로서 약 7년간 수렴청정을 실시했습니다. 이 시기 국정은 한명회, 신숙주 등 세조 시대의 공신, 즉 훈구 세력이 완전히 장악했습니다.

성종 이혈은 이들의 보호 아래 안정적으로 성장하며 왕으로서의 수업을 받을 수 있었지만, 동시에 조선은 강력한 훈구 세력이 모든 권력을 독점하는 시대를 맞이하게 됩니다.

 

9-2. 주요 업적: 조선의 시스템을 완성하다

성종의 치세는 조선 왕조의 통치 체제가 안정되고 유교적 이념이 국가 운영의 근간으로 확립된, 그야말로 '제도의 완성기'였습니다. 그는 할아버지 세조가 시작한 여러 사업을 마무리하고, 문치를 꽃피워 조선의 기틀을 단단히 다졌습니다.

 

조선 500년의 헌법, 《경국대전》 반포 (1485년)

세조 때 시작하여 예종을 거친 조선의 기본 법전, 《경국대전》최종적으로 완성하여 1485년(성종 16년)에 반포했습니다.
이 법전은 이전(행정), 호전(재정), 예전(의례), 병전(군사), 형전(법률), 공전(공공사업)의 6전 체제로 구성되어, 이후 조선 왕조 500년 내내 국가를 운영하는 불변의 기준이 되었습니다.
이로써 조선은 비로소 왕이나 신하의 자의적인 판단이 아닌, 법에 의해 통치되는 법치국가의 기틀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새로운 피의 수혈: 사림 세력의 등용

친정을 시작한 성종은, 너무나도 막강해진 훈구 세력을 견제하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새로운 정치 파트너를 찾았습니다. 그들이 바로 지방에 뿌리를 두고 성리학적 도덕과 의리를 중시하던 신진 세력, '사림'이었습니다.

성종은 김종직을 비롯한 사림 학자들을 적극적으로 등용하여, 3사(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와 같은 언론 기관에 배치했습니다. 이들은 훈구파의 비리를 날카롭게 비판하며 조정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었지만, 이는 동시에 훈구파와의 잠재적인 갈등 요인이 되었고, 훗날 연산군 대 무오사화의 비극적인 배경이 되기도 했습니다.

 

문화와 제도의 기틀 마련

  • 유교적 국가 의례 정비, 《국조오례의》: 신숙주, 정척 등이 국가의 주요 다섯 가지 의례(길례, 가례, 빈례, 군례, 흉례)를 정리한 《국조오례의》(1474년 완성)를 편찬하여, 왕실과 국가의 각종 의식을 유교 예법에 따라 체계화하고 왕실의 권위를 높였습니다.

  • 문화 진흥과 학문 장려: 세조 때 폐지되었던 집현전의 기능을 계승하는 홍문관을 실질적인 학문 연구 기관으로 강화하고, 경연을 활성화했습니다. 서거정 등이 중심이 되어 단군조선부터 고려 말까지의 역사를 정리한 편년체 통사인 《동국통감》을 편찬하게 하여 민족사의 체계를 세우고 국가의 정통성을 확고히 했습니다.

    우리나라 역대 시문을 모은 《동문선》, 음악 이론서 《악학궤범》, 지리지 《동국여지승람》 등 다양한 편찬 사업을 통해 조선 초기 문화의 융성기를 이끌었습니다. 특히  동국여지승람은 훈구파와 사림파가 협력해 간행한 지리지라는데 의의가 있습니다.

  • 민생 안정과 교육 진흥: 국가가 직접 세금을 걷어 관리에게 녹봉을 주는 관수관급제를 시행(1470년)하여 관리들의 수탈을 막고, 암행어사를 파견하여 지방관의 부정부패를 막고 공정한 행정을 펼치도록 지방관 감찰을 강화했습니다.

    또한 흉년에 대비하기 위한 구휼 제도인 사창제를 정비하고, 향촌 사회 교화를 위한 향약을 장려했으며, 성리학 교육 기관인 서원 설립의 기반을 마련하는 등 교육 진흥에도 힘썼습니다.

9-3. 갈등과 균열: 태평성대 속 비극의 씨앗

성종의 치세는 표면적으로 안정되고 문화가 융성한 시기였으나, 그 이면에서는 다음 시대를 뒤흔들 거대한 균열이 조용히 만들어지고 있었습니다.

훈구와 사림, 두 세력의 공존과 대립

성종은 왕권 강화를 위해 사림 세력을 등용하여 훈구 세력을 견제하는 절묘한 균형 정치를 펼쳤습니다. 이 두 세력은 정치적 이상과 기반에서 큰 차이를 보이며 점차 대립 구도를 형성했습니다.

  • 훈구파: 세조(수양대군)의 집권에 공을 세운 공신들과 그 후예들입니다. 부국강병과 중앙집권적 통치를 중시하며, 막대한 토지와 권력을 가진 기득권 세력이었습니다.

  • 사림파: 지방의 중소 지주 출신 학자들입니다. 성리학적 도덕과 의리를 정치의 근본으로 삼고, 왕도 정치의 실현을 꿈꾸었습니다. 이들은 3사를 중심으로 훈구파의 비리와 부패를 맹렬히 비판하며 정치 개혁을 요구했습니다.

사화의 전조와 왕실의 비극

  • 김종직의 〈조의제문〉: 사림의 영수였던 김종직이 과거 세조의 단종 살해와 왕위 찬탈을, 항우에게 죽은 초나라 의제에 빗대어 우회적으로 비판한 글입니다.
    이 글은 성종 대에는 문제 되지 않았으나, 그의 제자 김일손이 이를 사초(史草)에 기록하면서 훗날 훈구파가 사림 전체를 공격하는 결정적인 빌미를 제공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조선 최초의 사화인 무오사화(1498년)로 이어지는 직접적인 배경이 되었습니다.

  • 폐비 윤씨 사건: 한편, 왕실 내부에서는 더 큰 비극이 싹트고 있었습니다. 성종의 왕비였던 윤 씨(연산군의 생모)가 왕의 얼굴에 손톱자국을 내는 등 투기가 심하다는 이유로 폐위된 후, 결국 사약을 받고 죽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당시 어렸던 세자 이융(연산군)은 이 사건의 진실을 모른 채 성장했지만, 그의 가슴속에는 어머니의 비극적인 죽음이 남긴 깊은 상처와 분노가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이는 훗날 수많은 사람의 피를 부르는 갑자사화(1504년)직접적인 원인이 됐습니다.

성종의 죽음과 다가오는 폭풍

1494년, 성종 이혈은 재위 25년 만에 38세의 나이로 승하했습니다. 그는 조선의 법제와 문물을 완성한 위대한 군주였으나, 그가 아슬아슬하게 유지하던 훈구와 사림의 정치적 균형은 그의 죽음과 함께 깨지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뒤를 이어, 가슴속에 분노를 품은 아들 연산군 이융이 즉위하면서, 억눌렸던 모든 갈등이 폭발하며 조선은 걷잡을 수 없는 피의 시대로 빠져들게 됩니다.


에필로그: 완성된 질서, 그러나 예고된 비극

조카의 피 위에 세워진 세조 이유의 강력한 왕권, 그 위업을 잇기엔 너무나 짧은 시간을 살았던 예종 이황의 시대, 그리고 마침내 조선이라는 국가의 시스템을 완성시킨 성종 이혈의 태평성대. 조선왕조 3편의 시대는 혼란과 안정이 공존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성종은 조선이라는 거대한 그릇을 법과 제도로 완벽하게 채워 넣었습니다. 하지만 그 안정된 수면 아래에서는, 훈구와 사림이라는 두 개의 거대한 흐름이 서로 부딪히고 있었고, 왕실 내부의 비극은 다음 시대의 폭풍을 예고하고 있었습니다.

다음 4편에서는, 이 모든 갈등이 폭발하며 조선을 피로 물들인 폭군 연산군 이융과, 그 혼란을 수습하고 새로운 시대를 연 중종 이역, 그리고 그의 아들 인종 이호의 이야기로 여러분을 찾아가겠습니다.


※ 안 내 

'조선왕조 업적 완전정복' 시리즈로 1편에서 9편으로 이어지는 조선왕조 27명 왕들의 업적을 총정리가 계속 이어집니다.

발행 완료가 되면 아래의 링크에서 확인해 보실 수 있어요!

편 수 제 목 상 태
1편 [조선왕조 1편] 태조이성계 정종이방과 태종이방원 업적 총정리  발행 완료
2편 [조선왕조 2편] 세종이도 문종이향 단종이홍위 업적 총정리 발행 완료
4편 [조선왕조 4편] 연산군이융 중종이역 인종이호 업적 총정리 발행 완료
5편 [조선왕조 5편]–명종이환 선조이연 광해군이혼 업적 총정리 발행 완료
6편 발행 완료
7편
[조선왕조 7편] 숙종이순 경종이윤 영조이금 업적 총정리
발행 예정
8편
[조선왕조 8편] 정조이산 순조이공 헌종이환 업적 총정리
발행 예정
9편 [조선왕조 9편] 철종이변 고종이희 순종이척 업적 총정리 발행 예정

📚 참고 자료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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